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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 다음에도 웃고 싶은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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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신용호
정치부문 차장

잔치가 끝난다. 총선 승부가 오늘 갈린다. 거칠었던 싸움은 가고 여의도엔 승자의 환호성만 남을 테다.

 2004년 4월 15일,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만든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승리한다. 민주당을 탈당한 47명이 만든 당이 152석의 거대 여당이 된다. 그 당은 승리 열흘 뒤 강원도 설악산 오색약수터에서 당선자 워크숍을 연다. 지금도 그 분위기는 생생하다. 워크숍 행사장에 나붙은 강경한 개혁 구호. 세상을 뒤엎을 것 같은 자신감. 특히 강경파 의원들의 기세는 누구도 막기 어려워 보였다. 거기선 ‘이념 정당’이냐 ‘실용 정당’이냐를 놓고 치열한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시작부터 이념 투쟁이었다. 한 강경파 의원은 “혁명이 성공했으면 혁명 정권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강경파가 득세한 열린우리당은 이내 ‘강경 이념 모드’에 돌입한다. 노 전 대통령이 해주자는 이라크 추가 파병에 대한 반대 주장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법 제정 등 4대 개혁입법안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민생은 뒷전이었다. 그 길로 열린우리당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명분에만 치우쳐 이념을 외치는 그들에게서 읽힌 것은 오만이었다. 나를 뽑아준 유권자들의 삶이 어떻게 나아질 것인지 고민하기보다 자신들의 이념을 구체화시키겠다는 의욕뿐이었다.

 2008년 4·9 총선 이후 승자의 오만함도 다르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과반이 넘는 153석을 차지한다. 과거 정권에 신물이 난 민심은 대선에 이어 총선까지 한나라당에 표를 몰아줬다. 대선 후 4개월 만에 치러진 총선 결과는 미리 점치는 것이 싱거울 정도였다. 보수세력의 압승이었다. 민심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의회 권력까지 손쉽게 거머쥔 한나라당은 ‘이제 우리 세상이야’라며 거만해졌다. 그해 불거진 촛불 사태는 그들의 독선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해 초래한 대표적인 사례다. 광우병 공포로 인해 내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분노를 다독거리기보다 정부 대책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란 말을 앞세웠다. 유권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당시 공천도 오만의 극치였다. 이 때문에 여권은 이 대통령 임기 내내 친이·친박계의 갈등으로 점철됐다.

 권력을 잡으면 오만해지고 이내 내리막길을 걷는 데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17, 18대 총선 후 그들이 보여준 극명한 교훈이다. 권력을 쥔다는 게 자칫하면 살점이 날아가는 칼날 위에 서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인 걸 그들은 망각했던 것 같다. 신중하고 겸손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오만의 늪에 빠지고 마니 말이다. 19대 총선에서 당선되는 승자나 그 집단은 두 사례를 꼭 기억하길 바란다. 승자가 돼 승리에 취하는 건 단 하루면 족할 거다. 유권자들은 정치인이 오만하고 방자한 것을 절대 봐주지 않는다. 겸손해져야 함을 곱씹고 곱씹어야 한다. 그런 승자가 민의를 받들어 다음 총선에서도 웃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