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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설치·조각展

중앙일보

입력

'미술'하면 '회화'만을 떠올리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그런 독자는 이번 주에 추천하는 전시를 꼭 찾아볼 필요가 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 재미' 면에서 보자면 설치·조각 등이 회화보다 한 수 위일 지도 모른다. 웬지 입체 작품은 더 낯설고 관람하기 힘들 것 같지만 가서 보면 구석구석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작가가 아니다

성곡미술관에서 내건 전시 설명 문구를 보자. '이 사람들은 작가가 아니다. 아마추어이거나 기술자다. 그러나 소위 현대미술이란 것은 그들도 할 수 있다. 여기 작품들을 보라.'

이 전시는 현대미술에 대한 야유와 도전에서 출발한다. 전시 참가자는 영상물 제작자·기계설계전문가·조형물 제작자·CF감독·산부인과 의사 등 다양하다. 기성작가가 아닌 아마추어들이 모여서 성곡미술관 개관 5주년 기념전을 빛내고 있다.

미술관측의 기획의도를 들어보자. '현대미술은 예술적 방향감각·사상성·심미안 등을 결여한 채 표류하고 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반짝이는 재치나 아이디어를 나타내는 정도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매체를 다루는 전문성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현대미술의 표현이 가능할 것 아닌가."

애니메이터 이용규씨는 입체 캐릭터가 영화배우 송강호의 대사를 하는 그래픽 작품을 선보인다. 관객의 관심은 여기에 더 끌릴 것이라는 변. MBC 컴퓨터그래픽팀은 시드니 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표정을 확대, 흑백으로 표현했다. 어떤 미술작품이 이만한 감동을 끌어낼 수 있겠냐며 자신감을 보인다.

피아니스트 임동창씨는 한지창문을 붓으로 긁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요즘 유행하는 '소리조각'을 조롱한다. 양철로 조립한 서태지의 대형 얼굴상 '울트라메니아'를 내놓은 조형물 제작업자 황남규씨는 오브제가 별 거냐며 쓴소리를 남긴다. 생활사 자료수집가 최웅규씨의 작품도 재밌다. 고흐의 대표작 '화실풍경'을 실물로 재현한 방을 꾸몄다.

2001년 1월 20일까지 /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 / 문의 02-737-7650

키키 스미스 展

'나는 물체들이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작품이 그를 만드는 데 투입되는 에너지를 간직한다고. 그렇기에 나는 예술가가 되었다.' - 작가의 작품노트중 한구절.

인간의 몸을 소재로 생노병사와 정신적·신체적 분열의 문제를 표현해온 독일 출신의 조각가, 키키 스미스展이 열리고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관 테이트 갤러리를 포함, 세계 유명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는 세계적인 여류 조각가.

가톨릭의 영향과 인디언의 전통문화 등에서 받은 영감을 작품에 투영, 신화와 동물세계·자연환경·우주계 등 형이상학으로까지 활동의 주제를 넓혀갔다.

신체를 소재로 작품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페미니즘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와 자주 비교된다. 그렇지만 부르주아가 주로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을 작품에 담아낸다면 스미스는 종교와 신화, 전설 등에서 비롯된 감성을 담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차이.

이번 서울전에는 대형 설치물 한점과 드로잉 14점, 판화 21점, 조각 5점을 선보인다. 옛 카르타고의 전설적 여왕 '디도'의 숭고한 분위기를 재현한 브론즈 작품 '번제', 북구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을 나타낸 '사이렌', 구악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하와를 상징한 '사과를 들고 있는 뱀' 등이 눈길을 끈다.

12월 16일까지 /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 문의 02-735-8449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잴 수 있을까?

홍대옆 쌈지스페이스의 3개층을 모두 이용하는 조각가 김종구의 개인전은 '전시'라는 기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시도다.

현장 퍼포먼스, 야외풍경의 회화화, 수직과 수평의 복합 구성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새로운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우선 1층의 제1전시실에 들어서면 합판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방을 만난다. 밀폐된 방안에는 방열복을 입고 마스크를 쓴 '용접공'의 모습을 한 작가가 있다. 매일 오후 2~5시, 하루 세시간씩 기다란 쇠몽둥이를 그라인더로 깎아내는 작가의 작업과정을 보면서 다른 전시실의 작품들이 태어난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방바닥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수평앵글로 놓여져 날마자 쌓여가는 쇳가루를 비춘다. 매일 그 높이를 더해가는 쇳가루들은 더이상 그저 '쇳가루'가 아니라 구름 저편의 산등성이가 된다. 하루하루 매시간 변하는 능선이며 계곡이다.

2층으로 올라간다. 양쪽 벽에 스크린이 설치돼 있다. 한쪽에는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떼의 영상이 잔잔하게 흐르고 맞은편 스크린에는 같은 들판에 양떼 대신 하얀 사각형이 드문드문 서있다. 석고판에 쇳가루로 그림을 그려 들판에 세워놓은 것으로 지난 7월 미국 뉴욕주 오마이 카운티의 야외에 2년 예정으로 설치해놓은 야외 그림이다. 비바람, 쇳가루의 산화 등으로 천천히 변화하는, 시간·공간·주변의 풍광이 함께 어우러지는 살아있는 예술.

이외에도 작가가 종이 위에 쇳가루로 쓴 글씨며 한반도 산맥의 축소형 등 찬찬히 들여다볼 만한 작품들이 많다.

12월 20일까지 / 서울 홍대옆 쌈지스페이스 / 문의 02-3142-1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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