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사잇길과 동구 밖 과수원 길...평생 그린 북녘 고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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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호 35면

아동문학가 박화목의 1981년 모습. [사진 중앙포토]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생긋//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53·끝> 시인·아동문학가 박화목

우리나라의 대표적 국민가곡 ‘보리밭’과 어린 시절 누구나 배웠을 동요 ‘과수원길’이다. ‘이런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들이다. 두 곡 모두 아동문학가이며 시인인 박화목(1923~2005)의 시에 곡을 붙인 것들이다. 이들 외에도 노랫말이 된 박화목의 시와 동요는 ‘망향’ ‘도라지꽃’ ‘가을 소풍’ 등 10여 편에 이른다. 대개가 그가 두고 온 ‘고향’을 그리고, 추억에 빠져들게 하는 ‘옛 생각’에 잠기며 쓴 작품들이다. 실향민이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만 그는 유달리 일평생 고향을 그리며 살았다. 월남한 실향민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감상에 젖는 것도 그의 그런 심성과 통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황해도 은율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박화목은 평양신학교 예과를 마친 후 만주로 건너가 봉천신학교를 졸업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문학에 뜻을 둔 그는 18세이던 41년 월간 ‘아이생활’지에 ‘겨울 밤’ ‘피라미드’ 등이 추천을 받으면서 동시를 쓰기 시작했다. 광복 직전 귀국해 평양 인근의 누나 집에 머물던 박화목은 북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이듬해인 1946년 2월 선배 아동문학가인 함처식과 함께 월남을 결심한다. 한밤중에 걸어서 삼팔선을 넘은 그는 여관방에서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며 ‘38도선’이라는 제목의 동시 한 편을 쓴다. 이 작품이 서울에 도착한 직후 윤석중이 펴내던 월간 어린이잡지 ‘소학생’에 실리면서 공식적인 데뷔작이 된다. 그때 ‘소학생’은 동시 현상 공모를 실시하고 있어 박화목은 백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상금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 상금이 수중에 무일푼이던 그에게 서울에 근거를 마련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으니 여러모로 의미 깊은 작품이었던 셈이다.

서울에 정착한 박화목은 중앙방송국(지금의 KBS)의 시 담당 프로듀서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죽순’ ‘등불’ 등의 동인활동을 펴면서 새로 발족한 청년문학가협회에 아동문학위원으로 참여해 아동문학의 기틀을 다졌다.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란해 직업도 없이 떠돌던 박화목은 우연히 동향의 작곡가인 친구 윤용하를 만나게 되었다. 옛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윤용하가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만들겠다며 박화목에게 서정시 한 편을 써달라고 했다. 그때 박화목이 써준 시에 곡을 붙인 것이 가곡 ‘보리밭’이었다. 본래 제목은 ‘옛 생각’이었으나 윤용하가 곡을 만들면서 ‘보리밭’으로 제목을 바꿔 발표했다.

전쟁이 끝나 다시 서울로 올라온 박화목은 본격적인 문단 활동에 나섰다. 아동문학가 10여 명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아동문학가협회를 결성하는가 하면 한국 크리스찬문학가협회를 주도적으로 창설했다. 직장도 기독교방송으로 옮겨 편성부장,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실향민으로서 무난하게 남쪽에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성품 덕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했고, 남들과 시비에 얽히는 것을 꺼렸다. 평생 맥주만을 즐겨 마신 그는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적이 없었다. 술버릇이 나쁜 술꾼들도 그가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는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어찌 보면 박화목은 동화처럼 살았고, 아동문학가답게 살았다. 늘 고향을 그리워하고 옛 추억에 잠기는 것도 그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집에서만 50년을 살았다. 정부가 50년대 후반 집 없는 문화예술인들을 위해 조성한 홍제동 문화촌에서였다.

그는 이곳에 처음 입주한 30여 명의 문화예술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입주자가 낡아버린 집을 개축하거나 개조했고, 또 상당수의 입주자들이 문화촌을 떠났지만 박화목은 보수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꿋꿋하게 원형을 유지하면서 살았다. 주위 사람들이 “집이 많이 낡았으니 손 한번 보고 사시라”고 권하면 “내가 처음 입주할 때 얼마나 감동했는데 본래 모습을 잃으면 그때의 감동이 제대로 살아남겠느냐”며 막무가내였다.

박화목은 생전에 시집,동화집,동시집 등 약 20권의 저서를 내놓았다. 대한민국문학상,서울특별시문화상 등 예닐곱 개의 상도 받았다. 여러 문학단체의 수장도 거쳤다. 46년 월남해 2005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꼭 60년을 산 남쪽 생활이 그만하면 만족할 법도 하지만 그런 성취들이 고향 잃은 허전함을 달래주지는 못했던지 문화촌 집에서 눈을 감으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50년을 산 문화촌의 홍제근린공원에는 그가 고향을 그리며 썼다는 ‘과수원길’을 새긴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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