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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록 연재소설 - 붓다의 십자가 4. 근심 없는 나무들 ②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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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 세존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이 아닌 일언활인(一言活人)의 성인이었다.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살려낸 것이다. 일찍이 용수 보살이 『중론』에서 간파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실상을 체험하며 산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수용하는 세상은 언어로 표현된 허깨비들일 뿐이다. 예수는 그런 언어의 구성력으로 생명을 살려냈다. 숭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다.

[일러스트=이용규]

반딧불이 점멸하는 산촌에 열 사흗날 달빛이 출렁거렸다. 잠에 빠진 마을 밤풍경은 물 속 같기만 한데 달빛 젖은 초가지붕 위로 높이 솟은 2층 누각에서 환한 등잔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판각 공방과 필경사 탁연의 방이 있는 목조건물이었다. 나는 문득 이 마을이 서쪽 먼 이방에서 바닷물에 떠밀려온 한 척의 범선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말없이 뒤따라가고 있는 김승 촌장은 선장이 되는 셈이었다.

우리가 누각 앞에 다다랐을 때, 말발굽소리를 들은 전추산이 마중 나와 있었다. 김승이 말에서 내리자 나도 따라 내렸다. 전추산이 말고삐를 받아 마구간으로 사라졌다. 커다란 배나무 그늘이 드리운 누각 아래층 공방은 적요한데 2층 창문 너머로 서가(書架)가 보였다. 바깥 창호를 열쳐놓아서 망사(網紗)친 안쪽 창으로 방안이 그대로 드러났다.

“늦으셨습니다, 촌장 스님.”

안에서 나온 탁연의 깐깐한 목소리였다. 무엇인가 열중하고 있는 듯 그는 모습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래요. 판각 공방에 볼 일이 있군요.”

김승이 그렇게 대꾸하더니 괴춤에서 열쇠를 꺼내 공방 자물쇠를 열었다. 눈뜬 물고기 모양의 자물쇠였다. 육중한 나무문이 열렸다. 어스름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출입구 왼쪽 벽 탁자에 잿불을 담아놓은 화로가 보였다. 김승이 인두로 잿불을 헤쳐 종이 심지를 박았다 꺼내자 잠자던 불꽃이 화들짝 깨어났다. 그 불꽃은 옆에 놓인 촛대로 건너갔다. 공방 풍경이 꼬물꼬물 되살아났다. 계단이 놓인 복도 옆으로 나무 칸막이가 설치된 공방에는 작업대와 경판들이 즐비했다. 촛대를 든 김승이 복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까와 모양이 다른 원통형 자물쇠가 채워진 나무문이 나타났다. 내실로 보였다. 나는 김승이 문을 따기 쉽도록 촛대를 대신 들어주었다.

내실 문을 연 김승이 촛대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 벽에 설치된 시렁 가득 경판들이 빼곡했다. 시렁은 강화도 선원사 대장도감 판당의 구조와 흡사했다. 다만 머리 높이의 횡목(橫木)에 총천연색이 입혀진 판화들이 일렬횡대로 걸려 있었다. 여러 장 찍어내기 위해 거꾸로 새긴 판화가 아니라 그대로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든 판화였다. 새김은 정교했고 색채는 화려했다. 보는 이를 조복시키는 힘까지 들어 있었다. 머리에 광배를 쓴 주인공의 일대기를 표현한 판화들이었는데 어림잡아도 백 장은 넘어보였다.

북벽 시렁 앞에 키 작은 서가와 기다란 탁자가 보였다. 김승은 그곳으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 판화에 눈길을 빼앗기고 있던 내가 그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려고 하자, 손짓으로 옆자리를 권했다. 그가 서가에서 꺼낸 책자는 겉표지와 귀퉁이가 불에 탄 두 권의 절첩본 경전이었다. 하나는 『서청미시소경』 다른 하나는 『경교삼위몽도찬』이었다. 수기 스승과 내가 송악산 안화사에서 새벽까지 독파하다가 몽골군 습격을 받고 달아나면서 미처 가져오지 못한 경교 문헌들이 떠올랐다. 눈썹이 불에 타는 것처럼 화급했던 나머지 바랑조차 챙길 겨를이 없었다.

“이 경전들 기억나오? 내 동지들이 안화사에서 챙겨온 거요.”

“아, 불구덩이에서 구제됐었군요!”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경교에 특별한 가치를 둬서가 아니었다. 황궁의 국립도서관 보문각이 불타버린 마당이었다. 어쩌면 이 나라에 달랑 한권씩 밖에 남아있지 않는 귀중한 문헌이었기 때문이었다.

“수기 스님과 승정의 바랑은 내 방에 있답니다.”

“아니, 뭐라구요?”

그 와중에 바랑까지 챙겨왔다는 게 놀라웠다. 아수라장에 홀연히 나타나 목숨을 구해준 것만도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봉두난발의 거지왕초와 기마대원들은 신장(神將)들이자 천수천안관세음보살들이었다.

“화마가 삼키기 직전, 극적으로 건졌다 하오.”

“중이 중생을 구제해야 하는데 중생이 중들을 구제했어요.”

그날, 거지왕초 등짝에 붙어서 살아 돌아온 나는 어깨뼈가 부러졌었다. 그야말로 뼈아픈 고통과 고열에 시달리느라 헛것이 보였을 정도였다. 차차 안정을 되찾아가면서 나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입은 은혜는 지금 이 나라의 승가와 생민들의 처지를 상징하고 있었다. 부처와 승가가 세상을 구제하는 게 아니라 생민들이 부처와 승가를 거두고 있는 꼴이었다.

“경교도들이 불교 승려를 구한 거지요.”

김승이 내 눈을 주시하며 상기시켰다. 그런 말도 충분히 성립할 수 있었다. 나는 불타다 만 경교문헌들을 넘겨보며 나와 상관없던 것들이 사실은 특별한 인연으로 얽혀있는 세계의 비밀에 대해 생각했다.

“그거 가져가셔도 좋소. 그보다 방대하고 진귀한 문헌들이 많으니까.”

김승이 서가를 가리켰다. 두루마리로 묶은 경전들이 수북했다. 나는 매듭을 풀어서 그 경전들을 펼쳐보았다. 경교문헌들과 또 다른 문헌들이었다.

“대진국 상인이 가져온 성경(聖經)에서 발췌한 내용을 탁연 동지가 한문으로 번역한 4복음서들이오. 가져가 읽어보셔도 좋습니다. 잘 모르는 내용은 탁연 동지에게 물으시오. 짐작하셨겠지만 저 판화들은 복음서에 담긴 내용을 새긴 것이오. 서쪽나라에서 탄생하신 예수 세존의 거룩한 행적과 가르침 말이오.”

나는 두루마리들을 죄다 꺼내 품에 안았다.

“언제 어떻게 경교도가 되셨습니까?”

김승에게 이미 경도된 내가 진작부터 묻고 싶었던 걸 꺼냈다.

“수년 전, 조물주 하느님의 뜻대로!”

김승은 알로하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고 조물주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썼다.

“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용』에 ‘하늘이 하는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상천지재 무성무취:上天之載 無聲無臭)’고 했다지요? 부인사에서 그 참혹한 일을 겪고 떠돌이로 지내다가 인연을 만나 이렇게 된 거요. 내일 가온 어머니를 만나보시오.”

김승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미진했지만 더 잡도리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탁연 말입니다. 남해 분사도감 일도 하고 있던데 그곳에서 많은 경판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탁연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약초골 공방에는 경판과 맞바꾼 것으로 보이는 은병들이 있었습니다. 가네야마와 거래했나 싶어서 아까 확인해보니까 서로 모르는 관계랍니다.”

“탁연은 거짓말할 분이 아니오.”

김승 역시 남해의 정안과 마찬가지로 탁연을 반석처럼 신뢰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탁연이 범인인데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빤질빤질한 탁연의 어떤 점이 이런 믿음을 준 걸까.

“승정께서 묻는 방법을 달리해보면 어떻겠소? 서로 어법이 다를 수 있으니까.”

맞다. 그럴 수 있다. 나는 젊은 날, 부인사에서 머물 때 읽었던 용수 보살의 『중론』을 상기했다. 언어가 실제를 구성한다. 뿐더러 세상에 없는 것마저도 언어로 담아내면 존재하는 것처럼 되고 만다. 그래서 언어는 우리를 곧잘 속인다. 그뿐인가. 똑같은 언어를 써도 세계관이 다르면 개념이 다르고 개념이 다르면 대화가 되지 않는 법이다. 김승은 그걸 지적하고 있었다. 김승은 역시 고수다. 내 머릿속에서 아까 바디고개에서 봤던 별들이 영롱하게 빛났다.

우리는 내실을 나와 복도로 걸어 나왔다. 오른편 판각 공방들을 훑어보았다. 십 수 명의 각수장이들이 판각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2층에 들렀다가렵니다.”

출입구 계단 앞에서 내가 말했다.

“그럼 그러시오.”

김승이 촛대를 들어 불을 비춰주었다. 책들을 한 아름 껴안은 상태였으므로 거동이 불편했다. 열 두 개의 계단을 엉거주춤 올라갔을 때,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탁연이 문을 열어주었다. 김승은 화로 옆에 촛대를 놓아두고서 문을 닫고 나갔다. 계단은 안팎으로 놓여 있어서 어느 쪽으로든 출입이 가능했다.

“그거 내려놓고 오시지 않고. 내 방에도 있는 걸요.”

며칠 전에 맡았던 적이 있는 침향의 향내가 그윽했다. 안쪽 침실과 분리된 이 공간은 하나의 박물관이었다. 고급스런 가구들과 책, 경판, 족자, 도자기, 향로 등이 가득했다. 방 가운데에 커다란 탁자가 놓였고 십여 개의 의자들이 빙 둘러있었다. 다기와 차 봉지 옆에 있는 놋쇠 수로에서 은은한 침향이 피어올랐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았다. 며칠 전, 눈이 먼 상태에서 뭔가 보이는 것처럼 행세하느라 나는 벽에 걸린 불화들에 대해 언급했었다. 그런데 석가모니 대신 예수와 마리아가 들어있는 게 아닌가. 탁연은 나의 그런 치기어린 언행을 죄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다.

“복음서도 읽어보려고요?”

침실에서 주전자를 가지고 나온 탁연이 물었다. 두루마리들은 의자에 올려둔 상태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등잔불을 폭 감쌌다. 손이 뜨거웠지만 더 꼭꼭 감쌌다. 별안간 실내가 어두컴컴해졌다.

“뭐하는 거요?”

“무명을 밝히는 등불이 이렇게 갇혀서는 안 되겠지요.”

어둠이 고인 커다란 방안에 내 목소리가 조용히 여울졌다. 『전등록(傳燈錄)』이라는 중국 선종 서적이 있다. 석가여래의 법이 전해진 내력을 체계화한 기록으로 등불, 곧 진리의 역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경판을 훔친 까닭을 이해한다는 뜻이었다.

“…….”

노회한 탁연의 낯빛이 환해지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야 자기 말 상대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남해에서는 왜 야반도주했소?”

등불을 가뒀던 손을 거두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야반도주가 아니라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선 것이오.”

탁연이 당당하게 말했다.

“종상이라는 놈과 같은 소리를 하는군. 그쪽이 은병을 준 놈 말이오.”

“그 아인 사정이 아주 딱했소. 설마 그걸 빼앗지는 않았겠지요?”

“어떻게 분사도감 필경사라는 승려가 왜구들한테 경판을 넘길 수 있소?”

나는 탁연을 몰아붙였다.

“하하하, 왜구들이니까 더 건네줘야지요. 그들을 교화해야 노략질을 안 하지요.”

“하지만 당신은 국책사업의 성과물을 사사로이 빼돌린 거요.”

“경판이야 또 새기면 그뿐이오.”

“참람하오! 대장경이 어디 뒷거래로 사고파는 물건인가? 그걸 팔아먹을 권리가 당신에게는 없소.”

내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진정해요. 대장경, 그거 사고파는 물건 맞소. 금불상도 불화도 모두 사고팔지요. 나한텐 경판 팔 권리도 충분하오. 대저 진리라는 건 훔치는 자가 임자요. 하물며 걸핏하면 쳐들어와 노략질하는 왜구들에게 이문을 남기고 팔아먹었다면 매우 잘한 일일 것이오. 공덕이면 공덕이 됐지 허물은 아니라는 말씀이오.”

“정안 어른께서 국량이 커서 봐준 줄이나 아오.”

“그 어른, 일거리를 다시 만들어준 날 고맙게 여길 거 같지 않소? 어차피 명분 만들고 시간 벌기 위해서 하는 국책사업이니까 말이오.”

“성직자가 남의 재물을 그렇게 훔쳐내도 되는 겁니까?”

“뇌두면 불가에 헌납할 재산이었소이다. 오늘날 이 땅의 불교계가 썩어빠진 게 다 흥청대는 물질 때문인데 그 많은 재산을 절집에 몰아줘요? 차라리 내가 덜어와 바른 일을 하는 데 쓰는 게 옳지요.”

탁연은 당당했다. 확신범은 죄의식이 없다. 말세를 당하니까 그만 도덕적 기준이 모호해져버렸다. 특히 이 자에게는 새로운 종교적 의무와 정치적 목적까지 있었다. 불교계와 조정에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황제가 임명한 대장도감 감찰관의 이름으로 이 자를 연행하여 벌할 수 있다. 불교계를 모독했고 국책사업을 방해했으므로. 그런데 칼날 같던 내 마음이 어디로 사라져버린 노릇인지 이 자를 벌하고 싶지가 않다. 더구나 이 자 뒤에는 내가 경도된 김승이 있었다.

“당신들이 바른 일을 할지 반란을 할지 누가 알겠소?”

내 어조는 조용하게 바뀌어 있었다.

“승정이 지켜보면 알 거 아니겠소이까. 우리 서로 사정 뻔히 아는 처지에 시간낭비 그만하고 이 복음서나 읽어봅시다. 내가 명구절만 뽑아 번역한 일종의 요약본이오.”

탁연은 두루마리 성경 한 책을 펼쳤다. 그러더니 막힘없이 줄줄 읽으며 해석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옆자리로 가서 바짝 달라붙은 나는 갓난아기가 어미젖을 무는 것처럼 허겁지겁 기이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었다.

먼저 구세주이자 왕중의 왕 예수 세존을 이채롭게 소개하고 있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서사(敍事)였다. 세례 요한의 사역, 세례와 시험받음, 갈릴리 바닷가 마을과 유대 땅에서 행한 예수 세존의 사역, 수도(예루살렘)에서 보낸 최후의 날들, 십자가형을 받고 열반 후 부활하여 승천한 이야기가 기막힌 비유법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이처럼 박진감 넘치고 외경어린 인물 연대기는 내가 일찍이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간음한 여인을 보호하는 대목은 압권이었다. 어느 날, 예수 세존이 사원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잡아와 어찌 처벌해야 할지를 물었다. 율법에는 돌로 쳐라 했는데 그대로 하면 평소 사랑과 용서를 가르친 예수 세존의 교훈과 어긋났고 용서하라고 하면 율법에 어긋났다. 이때 예수 세존이 한 말씀은 명쾌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지혜를 넘어 영성을 가진 현자만의 절묘한 어법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여인을 남겨두고 모두 자리를 떴다. 여인은 돌에 맞지 않았고 깨끗이 용서받았다.

예수 세존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이 아닌 일언활인(一言活人)의 성인이었다. 한 마디 말로 사람을 살려낸 것이다. 일찍이 용수 보살이 『중론』에서 설파한 것처럼 우리 인간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실상을 체험하며 산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수용하는 세상은 언어로 표현된 허깨비들일 뿐이다. 예수는 그런 언어의 구성력으로 생명을 살려냈다. 숭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경지다.

나는 복음서 요약본 두루마리를 향해 합장했다. 나는 진심으로 귀의한다. 예수 세존의 가르침은 가히 믿고 따를 만하다. 다소 과장 섞인 요소가 적지 않을지라도 그야 방편(方便)이 아니겠는가. 그런 방편은 석가 세존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렇다. 예수 세존은 깨달은 자다. 깨달은 자가 곧 부처이므로 예수는 부처다. 붓다다.

“가온에게는 이런 복음서보도 훨씬 더 수승한 성경이 있지요.”

내 심적 동요를 눈치 챈 탁연이 일러줬다.

“뭐라구요? 그런 경전을 판각하거나 인쇄하지 않았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왜요?”

“아직 틈틈이 채록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럼 가온만이 암기하고 있다는 건가요?”

“암기인지 신탁(神託)인지 분명치 않소. 분명한 건 가온이 말하고 보여주는 언행이 성자의 언행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가온에게 남다른 영험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소녀티가 완연한 가온의 얼굴이 눈에 어렸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가온부터 다시 만나봐야겠다.

“명필에 석학이기도 하시니 정안 어른이나 김승 촌장이 그토록 아끼시는 모양이오. 성경을 한문으로 이렇게 번역하는 일이 쉽진 않으셨을 텐데.”

내 어투는 이제 경어로 바뀌어 있었다.

“종교란 서로 통하는 데가 많다오. 문벌의 후예가 궁궐에서 벼슬도 해봤고 승가에서 불서도 두루 읽었소. 중국에 유학까지 했는데 맘먹으면 이쯤이야 못하겠소이까?”

이제 보니 탁연은 가진 것에 비해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편견이란 이렇게 실상을 왜곡한다. 편견 없이 대하고 보니 탁연은 뛰어난 인재였다.

“실은 남해 정안 어른이 내게 일거리를 전하라 했답니다. 판각 공방장이시니까 촌장보다 먼저 아셔도 상관없을 것 같군요. 내 바랑에 판하본으로 쓰라는 경전 한 질이 있어요.”

“『묘법연화경』 말씀인가요?”

“어떻게 아시오?”

“우린 늘 이런 식으로 일해 왔으니까요. 정안 공은 우리 공방에서 납품하는 경판들을 애지중지하지요.”

허탈해졌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을 줄이야 몽상이나 했겠는가.

“정안 어른도 경교도요?”

나는 머리가 쭈뼛했다.

“아니오. 그 어른이 우리 공방 경판을 무척 아끼니까 중간에서 내가 좀 융통성을 발휘한 거요. 그쪽 경판이 여간 조잡합디까? 우리가 명품으로 바꿔주고 그쪽 경판은 일본에 팔고 뭐 그런 식이지요.”

뛰어난 예술품을 만드는 장인만이 구사할 수 있는 융통성이었다. 누가 이 사람을 벌하겠는가. 설령 그렇게 얻은 재물을 헛되이 쓴다 해도 비난할 입이 없었다.

창밖 배나무 이파리 사이로 희뿌연 새벽빛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눈을 붙여야 내일 감찰활동을 하지 않겠소?”

목이 뻐근한 듯 탁연이 목 돌리기를 했다.

“쉬세요. 탁연 경교승!”

그 말은 이제부터 내가 그를 경교승으로 온전히 인정하겠다는 언표였다.

나는 책을 한 아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나는 영성어린 영혼, 가온을 새롭게 만날 생각을 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김종록 소설가
일러스트=이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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