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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음성인식 분야서 창업…정통부 출입기자 두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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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부 출입 기자 28명 중 17명이 벤처로 몸을 옮겼습니다.”

삼보컴퓨터와 용산전자랜드가 합작으로 만든 전자제품 쇼핑몰 TGLand 이민호 대표의 말이다. 이민호 대표 역시 중앙일보 전문기자직을 그만두고 삼보컴퓨터에서 일하다 벤처맨으로 변신했다. 10월 한달 사이트 매출만 4억2천만원. 8월부터 PC납품으로 30억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외국차 광고를 국내에서 제작한 일은 처음입니다. 크게 알려지지 않은 신선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모델을 찾았다고 합니다.”

최근 이민호 대표는 외국차 광고모델로도 얼굴을 팔았다.

“한두 달만에 망할 회사 사장을 모델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탄탄한 회사임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아니겠냐”고.

이미 벤처 거품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올 봄, 정보통으로 소문난 기자들이 우수수 자리를 옮긴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선 업계 현황을 손바닥 보듯이 알기 때문에 후회할 선택을 하지 않을 만한 자신이 있었다고 얘기한다. 언론인 출신 벤처인들은 자신이 취재하던 전문 영역으로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4월 문을 연 인터넷 보안전문 회사 사이젠텍 김강호 대표가 대표적인 예다. 사이젠텍은 ‘해커들이 모인 보안회사’. 김강호 대표는 ‘경영과 컴퓨터’ 편집장, 문화일보 기자로 일하는 동안 해킹과 관련한 기사를 집중적으로 써왔으며 97년에는 ‘해커를 해킹한다’는 저서를 내기도 했다. 취재 때문에 해커와 맺은 인연은 창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지리정보시스템 솔루션 개발사인 지파인더 김동현 대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80년대 말부터 쌍용그룹에서 일해왔다. IMF로 구조조정 한파가 몰아닥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신문사는 타의에 의해 떠났지만 벤처 창업은 자의로 한 일이다.

“벤처에 뛰어들기엔 나이가 좀 많지요. 하지만 현대는 ‘유목시대’니 제게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대표는 연구진을 모으고 1년여의 준비 끝에 올 3월 지파인드를 설립했다.

대한매일 편집국장을 지낸 보이스텍 강수웅 대표는 59세의 나이인 올 7월에 창업했다. 30여년 동안 신문사에서 일하다 생소한 분야의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모험’은 젊은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예.

뛰어난 기획력, 인적 네트워크가 자산

‘현실을 내 손으로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기자 출신 벤처인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창업 동기다. 우리기술 신규사업부 정진욱 이사(한국경제신문 출신) 역시 “다른 사람 얘기 쓰는 것 말고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들고 싶었다”고 밝힌다. “기자에게 취재 당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장난스레 말하기도.정진욱 이사와 우리기술 김덕우 대표는 MBC 장학퀴즈 출연자 모임에서 인연을 맺었다. 평소 사업감각 뛰어나고 사람 좋은 김대표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정이사는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스스로 사업가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사람을 만나는 일, 기획하는 일에는 자질이 있습니다.”

정진욱 이사는 우리기술이 지하철공사와 도시철도공사 역사 안의 물류독점권을 따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1월 중순경부터는 지하철 내 물류 거점을 활용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도서·음반 쇼핑몰 ‘행복한 아침’ 사업을 시작한다.

언론인들은 뛰어난 정보력과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지녔기 때문에 열렬한 스카우트 대상이 된다. TgLand 이민호 대표를 비롯 정보통신부, 경제부서 등 관련 분야의 전문 기자들은 5∼6번 정도의 스카우트 제의에 ‘시달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

때문에 언론인 출신 중에는 직접 창업한 CEO보다는 ‘월급’ 사장이나 홍보와 전략 기획을 담당하는 임원이 많은 편이다.

위성을 이용한 초고속 인터넷 사업을 벌이는 GCT코리아 김학진 상무 역시 기획과 회사 홍보와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다. 전자신문과 동아일보에서 정보통신부를 담당하는 기자로 일하는 동안 쌓은 업계 관련 지식이 바탕이 되는 것은 물론. “몇몇 경쟁업체가 있지만 높은 주파수 밴드인 무궁화 3호위성 Ka 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다”는 회사 자랑도 잊지 않는다. GCT코리아의 양방향 위성 인터넷 서비스 PowerSky 시범 서비스는 이달 중순부터 시작된다.

한국소프트중심 이규창 대표는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사람보다는 유리하겠지만 절대적인 도움이 되진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기자 생활 때 쌓은 인맥과 실제 사업에서 필요한 인맥이 직접 연관되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사업을 시작한 초기에는 ‘기자가 뭘 알아’하는 비아냥도 적지 않게 들었다”는 이대표는 ‘객관적인’ 눈으로만 보는 훈련을 오래 해온 덕분에 치열하게 이해관계를 따져야 하는 사업세계에선 기자 경험이 단점으로 작용하는 일도 많다고 지적한다.

디지털 방송장비와 인터넷 솔루션 판매업체인 ㈜슈가의 조근주 대표 역시 일확천금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찾아서 언론사를 떠난 인물이다. 조대표는 MBC 카메라출동 기자로 15년간 사회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사명감을 가지고 15년간 기자생활을 했죠. 하지만 내 자신의 삶이 아니라 대리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높은 연봉과 지위에 연연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걸프전,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 성수대교 붕괴…. 굵직굵직한 사건 현장을 지키던 조대표가 방송국을 나온 것은 올 6월이다. 94년 생후 2개월된 딸을 잃은 뒤부터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사업을 구상해왔다고 한다. 조대표는 기자로 정신없이 현장을 뛰어다니는 동안 잊고 지냈던 ‘인간’에 대한 관심을 ‘벤처’에서 찾는다. 기술이 지배하는 사회라지만 역시 그 기술도 결국 ‘인간’을 위한 것 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슈가에서 10월 1일 문을 연 생활정보 인터넷 사이트 나라TV는 한달 매출이 8천7백만원에 이른다. ‘돈 되는’ 성인정보 제공 사이트도 아닌 ‘밋밋한’ 생활정보 사이트로는 놀라운 성과다.

93년 창업, 중소기업을 위한 인트라넷 그룹웨어를 집중적으로 선보인 피코소프트 유주한 대표(전자신문), 여성 포털 사이트 여자와닷컴을 운영하는 우먼드림 이진광 대표(조선일보), 국산 그래픽 디자인 소프트웨어 ‘이지토마토’를 개발해 온라인 게임포털 사업을 준비 중인 디지털닷컴 신성은 대표(중앙일보), 음성인식 솔류션 개발사인 L&H코리아 엄판도 부사장(경향신문) 등 IT업계의 언론인은 셀 수 없이 많다.

언론인의 벤처 행렬에는 씁쓸한 면도 있다.

“IMF를 거치면서 기자 사회에 일대 각성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엘리트라고 자임하면서 살아왔는데,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한 관계자는 “벤처 열풍도 있었지만, 더 이상 기자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전한다.

정통부·경제부처 출입기자들은 영입대상 0순위, 스카우드 제의를 받지않은 이가 드물다.스카우트 제의, 거품은 아니었나

현재 안철수연구소 경영자문으로 있는 박태웅씨는 언론인들의 벤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봄 인티즌 대표로 벤처계에 발을 들여놨다. 한겨레신문에서 9년간의 기자 생활, 한겨레21·씨네21 창간과 한겨레마을 사업 등을 벌여 기획력과 사업 추진력을 인정받고 있었고, 현실세계를 접하고픈 욕심도 났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허브 사이트 대표로 승승장구하던 박씨는 그러나 지난 5월 인티즌을 떠났다.

“나에게 과연 CEO 자질이 있나 반성을 많이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수도 많았다고 생각하지요.”

인티즌을 나온 뒤 여기저기서 무수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기획력과 인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인터넷 사업체를 운영해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스카우트 ‘거품’이라고 봅니다.”

박씨는 과분하게 좋은 대우를 제시하는 곳은 피했다고 한다. “아직 ‘쉽게 살’ 나이는 아니다”라는 것이 이유다.

박씨는 지금 ‘보안’과 관련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자신있는 분야는 경영보다는 ‘기획’ 쪽이지만 스스로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습니다. 이 다음 번엔 근사한 ‘기획실장’이 될 수도 있겠지요.”

중앙일보 기자로 출발, 보사저널M 등 건강 관련 잡지사를 운영하다가 이게임넷을 창업한 이유재 대표가 말하는 기자 출신 CEO의 성공 비결은 이렇다.

“기자는 1/3 인생입니다. A, B, C 중에서 대개 B를 알죠. 하지만 경영을 하려면 속속들이 다 알아야 합니다. A와 C를 채우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기자에게는 세상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에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할 줄 아는 장점이 있으니 성공 가능성이 높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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