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없는 듯, 온갖 능력 품은 공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3호 32면

세상은 시간과 공간속에 담겨 있다. 태양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막막한 공간 속에서 오랜 시간 있어온 실체다. 이 우주에 있는 모든 별과 은하계, 그리고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과 동물들,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바이러스, 공기까지 모든 것을 들어내면 텅 빈 공간과 말없이 흐르는 시간만 남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진공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김제완의 물리학 이야기 진공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게 존재 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실체가 있어야 존재한다고 할 텐데 아무것도 없으면 그냥 없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궁금증이 생겨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완전한 진공은 이상적인 이야기지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진공소제기의 경우 그 진공의 질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대부분 공기를 모터로 밀어내 만든 텅빈 공간, 즉 진공으로 바깥 공기와 함께 먼지도 빨려 들어가서 청소가 가능해진다.
완전한 진공을 만들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자. 과연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을까? 그렇지 않다. 설명을 위해 이 세상이 두 개의 전자로만 구성돼 있다고 가정해 보자. 떨어져 있는 두 전자는 서로 밀어낸다. 서로 접해 있지도 않은 전자가 서로 밀어낼 수 있는 것은 둘 사이에 보이지는 않지만 전기와 자기의 힘을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장(場)’ 또는 ‘필드(Field)’라는 실체가 있기 때문이다.

지남철이 좋은 예다. 막대 자석에 흰 종이를 덮고 고운 쇳가루를 뿌리면 무늬가 나타난다. 무늬는 자기장(磁氣場)의 모습이다. 자기장을 따라 작용하는 자력 덕에 지남철은 닿지 않고도 작은 쇳덩어리를 잡아당길 수 있는 것이다. 전기가 있어도 전기장이 생긴다. 전기를 띤 물체가 움직이면 전기장과 자기장이 동시에 생겨나고 이들이 얽혀 전기장과 자기장의 진동하는 모습이 파동처럼 퍼져 나간다. 이를 우리들은 전파라고 한다. 전파는 빛의 속도, 즉 초속 30만㎞다.

그중에서 FM라디오 방송에 쓰는 전파는 메가헤르츠인데 1초에 수백만 번 진동한다. 파장이 더 짧아지면 적외선이 되고 이보다도 짧은 전파를 우리는 ‘빛’이라고 한다. 빛은 초당 수백조 번 진동하는 전파다. 빛은 파장에 따라 색깔이 다르며 파장의 크기는 대략 원자나 분자의 크기에 버금간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들어내도 아주 약한 전파는 그럴 수 없다. 손등을 확대하면 주름마다 세균이 보이듯 원자나 분자의 공간에 있는 약한 전파는 원리적으로 절멸(絶滅)이 불가능한 대상이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주 약한 전파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너무 어려워 자세한 설명은 피하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불확정성 원리’ 때문이다. 이 알듯 말듯한 현대 물리학 원리에 따르면 아주 좁은 진공이라도 거기엔 운동이 있고 약한 전파가 있다. 이게 어렵다면 ‘진공 에너지를 끌어내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 장치가 있다’는 설명이 진공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좀 쉬울 수 있겠다.

아무것도 없다는 진공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는 건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것처럼 허황되고 기막힌 말로 여겨질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다. 진공에서 에너지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원리는 이를 밝혀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카스미어 효과’라고 한다. 실험실에서는 나노 크기의 판을 진공 에너지를 이용해 움직이는 장치가 실현되고 있다(사진).

진공이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공간이지만 실제론 온갖 능력을 갖고 있다. 전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전자장이 있는가 하면 다른 기본 입자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물질장 도 있다. 이런 능력이 자극을 받을 때 전자도 튀어나오고 쿼크(중성자나 양성자 같은 원자 핵의 요소 입자들을 구성하는 더 작은 기본 입자)나 중성미자도 ‘창조’된다. 텅 비었다고만 생각됐던 진공 혹은 허공은 모든 물질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장(場)으로 짜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공이란 ‘자연의 테피스트리(직물에 무늬를 짠 걸개)’라고 할 수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전파가 깔려 있는 허공의 테피스트리는 빛이 만들어 내는 무지개 빛 무늬를 지니고 있을까? 중성미자를 만들어 내는 그 장(場)은 모습이 있다면 어떤 무늬일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름 모를 요소들은 어떤 무늬를 지니고 있을까?

이런 환상에 사로잡혀 진공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오늘도 많은 과학자가 상상의 날개를 펴기도 하고, 어려운 실험을 하며 땀 흘리고 있는 것이다. 허공은 말처럼 허공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비밀을 간직한 실체이며 찬란한 테피스트리라는 상상에 생각을 싣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