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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명예의 전당 (18) - 화이티 포드

중앙일보

입력

물론 그렇다. 뉴욕 양키스는 대투수들보다는 전설적인 타자들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알려진 팀이다.

일반인들에게 양키스를 대표하는 올드 스타들을 꼽으라면 누구나 쉽게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조 디마지오와 미키 맨틀 등을 입에 올린다. 레지 잭슨과 요기 베라, 얼 콤스와 데이브 윈필드 등도 물론 빠질 수 없다.

반면에, 투수들을 먼저 꼽을 팬은 그리 많지 않다. 일반인들은 양키스가 오로지 타력으로 그토록 강력한 '왕조'를 건설했던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야구 전문가들은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피칭이다'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하고 있는데, 양키스는 변변한 투수 하나 없이 방망이만으로 그러한 빛나는 성과를 올렸다는 말인가? 양키스는 야구라는 종목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가사의한 팀'이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야구 역사가의 대답은 'No'이다. 물론 양키스가 배출한 가장 유명한 스타들은 주로 타자들이었지만, 항상 안정된 투수진이 있었기에 그러한 강타자들의 능력이 빛나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루스의 전성기였던 1920년대에는 웨이트 호이트와 허브 페낙이 있었고, 게릭과 디마지오가 왕조를 계승한 1930년대에는 레프티 고메스와 레드 러핑이 강력한 마운드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키스가 배출한 위대한 투수들 중 한 명만을 꼽는다면, 그 한 명은 다름아닌 화이티 포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맨틀과 베라, 필 리주토 등을 앞세워 메이저 리그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의 양키스에서 에이스의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포드의 진가를 그의 통산 승수에서만 찾는다면, 팬들은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토록 강력한 타선 지원을 받고도 236승에 그친 투수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겠는가'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포드가 어떠한 여건에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포드는 1950년에 신인으로서 90%라는 놀라운 승률을 기록했고, 이듬해에 풀 타임 선발 투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51년과 1952년에 군 복무로 인해 마운드에 서지 못했고, 돌아온 첫 해에 18승을 거두었다. 이는 군대가 그에게서 빼앗아 간 승수가 상당했음을 말해 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케이시 스텡걸 감독이 그를 기용한 방식이다.

그는 자기 팀의 에이스였던 포드를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켜 규칙적으로 등판시키지 않았다. 스텡걸은 항상 포드를 강팀들(1950년대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시카고 화이트 삭스 등이 그러한 팀들이었다.)을 상대로 한 경기에 등판시키거나 상대 팀의 에이스와 맞붙게 했다.

이는 포드가 승수를 쌓는 데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명예의 전당에 오른 투수들 중 가장 높은 .690의 승률을 기록하였다.

역대 최고의 투수로 불리는 월터 존슨이나 많은 전문가들이 역사상 최고의 좌완 투수로 꼽는 레프티 그로브도 통산 승률 랭킹에서는 포드보다 밑에 있으며, 통산 511승의 사이 영과 쇠퇴기를 겪지 않은 상태에서 은퇴한 샌디 쿠팩스도 마찬가지이다.

이 두 요인이 없었더라면, 포드의 승률과 승수는 더욱 올라갔을 것이 확실하다. 그러했다면 그가 300승 투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명예의 전당 멤버 중 유일하게 통산 7할대 승률을 기록한 투수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드는 월드 시리즈 역사상 최다 연속 이닝 무실점이라는 빛나는 기록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포스트 시즌 연속 무실점 기록은 2000년에 마리아노 리베라에 의해 깨졌지만, 40년 가까이 최고 기록이었다. 포드의 시대에는 월드 시리즈가 유일한 포스트 시즌 경기였으며, 포드는 리베라보다 훨씬 긴 기간에 걸쳐 기록을 쌓았다.

그의 생애 통산 방어율은 2.75이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투수 중, '데드 볼 시대'에 활약했거나 주로 클로저로 등판했던 인물들을 제외하면 그보다 낮은 통산 방어율을 기록한 선수는 없다. 또한 포드의 방어율이 리그 평균치보다 높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포드의 강점은 스피드가 아니었다. 그는 그로브나 쿠팩스, 루브 워들 등과 같은 파워를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뛰어난 컨트롤과 다양한 변화구가 있었다. 그는 오버핸드 스로에서 스리쿼터, 사이드암까지 망라하는 다양한 투구 폼을 가지고 있었으며, 커브와 슬라이더, 싱커 등 여러 구질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또한 그는 1루 주자 픽오프에 관한 한 최고였다. 물론 본래 좌완 투수는 1루 송구에 있어서 기본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같은 사우스포들 사이에서도 그의 픽오프 능력을 따라갈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그는 수비력도 발군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포드의 가장 큰 장점을 다른 면에서 찾았다. 그는 중요한 경기, 긴박한 순간일수록 상대 타자들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많은 투수들이 큰 경기에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해 자기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스텡걸이 "누구든, 자신의 목숨이 한 경기의 승패에 달려 있다면 그 경기에 포드가 선발 등판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라는 언급을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포드는 청소년 시절 주로 1루수로 활약하였고, 프로에서도 같은 포지션을 맡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가 프로 데뷔를 준비하던 시기에, 한 스카우트가 포드는 1루수보다 투수로서 유망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결국 포드는 이 충고를 받아들였고, 1947년 양키스와 투수로 입단 계약을 맺었다.

마이너 리그에서 주목할 만한 성적을 올린 포드는 1950년 6월 빅 리그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그가 야구계에 자신의 잠재력을 드러내 보이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 빅 리그 첫 패전을 당했을 때, 그는 이미 9승을 올린 상태였던 것이다.

이 해에 양키스는 전년도에 이어 다시 월드 시리즈에 올랐고, 상대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포드는 팀이 1~3차전을 모두 승리한 상황에서 생애 첫 월드 시리즈 선발 등판을 하였고, 결국 팀의 우승을 결정짓는 승리를 올렸다.

그러나 메이저 리그는 제 2차 세계 대전에 이어, 한국 전쟁으로 인해 또다시 스타들의 입대라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포드는 첫 시즌을 마친 뒤 군복을 입게 되었고, 육군에서 1952년까지 근무하였다.

그가 돌아온 것은 1953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시즌에 18승을 거두었으며, 3.00의 방어율로 이 부문 4위에 올라 자신의 기량이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전년도에 월드 시리즈 4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던 양키스는 이 해에도 어김없이 '더 폴 클래식(The Fall Classic)'의 무대를 밟았고, 포드는 시리즈 6차전에서 1점만을 허용하는 뛰어난 피칭을 선보였다.

결국 양키스는 포드에 이어 등판한 앨리 레널즈가 승리를 거둔 6차전에서 시리즈를 마감했고, 월드 시리즈 5연패의 위업은 이후 그 어느 팀도 다시 달성하지 못했다.

1954년 시즌을 16승으로 마감한 뒤, 포드는 1955년 18승을 거두어 처음으로 다승왕이 되었다. 그의 역투를 발판으로 양키스는 전년도에 인디언스에 양보했던 리그 우승을 다시 차지했다.

그러나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에서, 포드가 2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7차전에서 다저스에 패했다. 다저스는 브루클린 시절 월드 시리즈에서 양키스와 7차례 대결했는데, 이 해에 유일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1956년 포드는 처음으로 방어율 타이틀을 차지했고, 19승을 거두어 팀을 다시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다. 그리고 시리즈 개막전에서 패했으나 3차전에서 멋지게 설욕을 하였으며, 팀은 3년만에 다시 왕좌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포드는 1957년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팀은 월드 시리즈에는 올랐으나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패했다. 포드는 1차전에서 브레이브스의 에이스 워런 스판을 눌렀으나, 5차전에서는 1점만을 허용하고도 타선의 지원 부재로 패했다.

이듬해 포드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은 스텡걸의 투수 기용 방식 때문에 14승을 올리는 데에 그쳤으나, 다시 방어율 수위에 올랐고 양키스는 리그 4연패를 달성하였다. 그리고 월드 시리즈에서 브레이브스에게 설욕을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959년과 1960년에도 포드는 꾸준히 좋은 방어율을 기록하였으나, 스텡걸은 여전히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포드는 이 두 시즌에 도합 28승을 올리는 데에 그쳤다.

그는 1960년 월드 시리즈에서 2완봉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으나, 양키스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7차전에서 패했다. 만약 그가 선발 등판 기회를 한 번 더 가졌다면, 그가 1905년 크리스티 매슈슨의 시리즈 3완봉승이라는 위업을 재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 시리즈에서 스텡걸이 포드를 1차전에 등판시켜 그의 등판 횟수를 극대화시키지 않은 것이 양키스의 패인이라고 주장하며 스텡걸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스텡걸은 양키스를 떠나게 되었고, 후임자는 랠프 후크였다.

후크는 스텡걸과는 달리 포드를 정상적인 4인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켰고, 이는 1961년 포드의 성적에 바로 반영되었다. 그는 이 시즌에 방어율에서는 리그 10위에 그쳤으나, 25승 4패로 다승왕이 되었다. 결국 이 해에 그는 처음으로 사이영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당시의 사이영상은 양대 리그를 통틀어 한 명에게만 수여되었다).

이 해에는 포드의 두 팀 동료 로저 매리스와 미키 맨틀의 홈런 페이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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