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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소설의 고전 '공주를 찾아서'

중앙일보

입력

작가로서 세상을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황당하고, 통탄스럽고, 실망스러운 일은 자기가 간절히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누군가 먼저 써버렸을 때일 것이다.

윌리엄 골드먼은 소설가이기보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영화 대본작가로 더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린시절에 가난한 이민자 출신인 아버지가 읽어주던 '공주를 찾아서' (원제는 The Princess Bride. 우리 말로는 '공주 신부' 쯤 될 것이다) 를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보다 앞서 그 소설을 써버린 작가 모건스턴에 대한 호들갑스럽게 맹렬한 질투심과 선망을 드러내 보인다.

오래 전에 절판된 이 책을 어렵게 구해 소아 비만증에 빠진 아들 제이슨의 열번째 생일선물로 전하지만 아들은 읽지도 않은 채 읽은 척 하는 데 실망한 작가는 '공주를 찾아서' 의 지루하고 재미없는 부분을 털어낸 축약본을 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건 트릭이고, 교묘한 함정이다. 애초부터 모건스턴이란 작가나, '공주를 찾아서' 의 원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제가 써놓은 소설에 유령 원작자를 내세워 능청을 떠는 일은 어딘지 낯익다.

아, 그래 저 위대한 보르헤스가 있다. 또 '에밀 아자르' 라는 유령 작가를 내세워 두 번째 공쿠르 문학상을 받아 챙긴 프랑스 작가 로멩 가리가 있다. 윌리엄 골드먼의 이 책도 판타지 소설의 세계적 고전으로 꼽힌다.

소설 속의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윌리엄 골드먼은 자신의 가족 관계, 자신이 쓴 책,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영화와 관련된 일들, 주변 정황에 대한 서술을 길게 늘어놓는다.

그 뿐아니라 소설 중간중간에 작가가 직접 나서서 소설의 진행과 관련된 온갖 시시콜콜한 담론을 늘어놓는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 허구와 실재는 뒤섞이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소설은 '정신이 나갈 정도' 는 아니지만 아주 재미있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 말괄량이 농장 소녀 버터컵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해 왕세자비로 변하고, 농장 하인 웨슬리는 공포의 해적 로버츠로 변신한다.

기사 웨슬리가 검술사 이니고와 괴력을 지닌 지크의 도움으로 버터컵 공주를 악당 험퍼딩크 왕자와 루겐 백작의 손아귀에서 구해낸다.
죽은 웨슬리는 마법사의 도움으로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그 얘기들의 사이사이를 진정한 사랑과 증오.복수, 상상 속에 나오는 온갖 종류의 괴물들과 거짓말.진실.열정.기적들이 채우고 있다.

이 책에서 구할 것은 인생의 지혜나 통찰력이 아니라 즐거움과 위안이다.

그 즐거움과 위안 속에는 촌철살인의 유머, 의표를 찌르는 뒤집기의 놀라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보여주는 저 우매한 몰입과 몽상, 허풍스러움과 유쾌한 소동 등이 버무려져 있다.

이유없이 우울하거나, 인생이 지나치게 지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합리적 이성은 잠시 한쪽으로 밀쳐두고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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