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안철수 신드롬 벌써 잊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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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철호
논설위원

안철수 서울대 교수의 행보가 미묘하다. 탈북자 강제북송 중단 집회장을 찾는가 하면, MBC 파업 지지 동영상을 촬영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빈소도 들렀다. 생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두 인물의 영정 앞에서 “우리 모두가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며 머리를 숙였다. 물론 예민한 현안에는 여전히 자물쇠 입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와 제주 해군기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요즘 히트 상품인 복지의 ‘복’ 자도 꺼내지 않는다.

 정치권에선 때 이른 품평(品評)이 한창이다. 새누리당 홍사덕 의원은 “안 교수는 대권 후보로서 시효가 만료됐다”고 단언했다. 멘토인 김종인·윤여준씨까지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민주당 문성근 최고위원은 한술 더 떴다. “안 교수가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면 편지라도 들고 찾아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안 교수 신드롬과 ‘나꼼수’의 반사이익을 가장 많이 챙긴 쪽이다. 이제는 외부 동력 없이 혼자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흑백논리로 보면 안 교수의 행보는 헷갈리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착각일지 모른다. ‘상식 대(對) 비상식’의 프리즘을 통해 보면 그의 노선은 총천연색으로 선명하다. 철저히 상식의 선을 걷고 있는 것이다. 안 교수는 우리 사회의 중도파가 마음속으로 원하는 대목만 콕 집어내는 느낌이다. 얄미울 정도다. 보수진영은 모르는 사이에 슬그머니 무장해제당하는 분위기다. 선거 연대에 매몰된 민주당은 한·미 FTA 폐기와 제주기지 반대로 상식의 선을 넘어 버렸다.

 여야는 공천을 놓고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요란하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은 “공천에서 친이·친박 개념은 없었다”고 했다. 민주당 한명숙 대표는 “알찬 공천”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새누리당에선 ‘친이(親李) 학살’이란 비명이 터져 나오고, 민주당에선 정치가 직업으로 굳어진 486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피가 낭자한 공천 현장에서 유독 돋보이는 인물은 백의종군을 선언한 김무성 의원과 깔끔하게 퇴장하는 강봉균 의원이다. 그들 뒷모습에서 50% 지지율이 5% 지지율에 선뜻 양보한 안철수 신드롬이 어른거린다.

 정치권은 서로 물어뜯는 낡은 선거 관행을 반복하고 있다. 박 위원장이 “한·미 FTA와 제주기지에 대해 말을 바꿨다”며 비난하자 한 대표는 “무식의 극치”라 맞받아친다. 오로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을 밀어내야 하는 외줄타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지금은 안 교수라는 대안이 남아 있다. 정치권의 입씨름이 거칠어질수록 대중의 관심은 안 교수로 향하게 된다. 그의 여유로운 대사부터 기존 정치권과 차별된다. “여야가 잘하면 저까지 정치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한다.” “탈북자의 인권은 이념과 체제를 떠나 가장 소중한 가치다.” “방송의 진실을 억압하려는 시도는 차단돼야 한다….”

 여야는 누구도 안 교수를 적으로 돌리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다. 박 위원장은 “그는 소통에 훌륭하다”며 치켜세웠다. 한 대표는 “영입과 단일화 두 가지 다 가능하다”며 문을 열어 놓았다. 모두 그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안 교수는 총선에 한 발 비켜서 좀체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대선 양자 대결 여론조사에서 여전히 선두를 달리는 마법이 이어지고 있다. 여야가 총선 승리에 매달려 상대방을 할퀼수록 유권자들은 기존 정치에 신물을 낼 수밖에 없다. 그만큼 탈(脫)정치의 공간은 넓어진다. 어쩌면 안 교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이기고 있는 게임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태풍은 필리핀을 거쳐 오키나와 부근에서 한동안 정체한다. 여기서 태풍의 운명이 엇갈린다. 민심이라는 바다가 차가워지거나 강력한 북태평양 고기압에 가로막히면 단순한 열대성 저기압으로 소멸한다. 반대로 대기가 불안정하고 뜨거운 바다에서 수증기가 보충되면 막강한 수퍼태풍으로 자란다. 지금 안철수 바람도 그 어디쯤 있을지 모른다. 총선을 거치면서 안풍(安風)이 온 세상을 집어삼킬 태풍으로 변할지, 아니면 열대성 저기압으로 끝날지 가만히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