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 유학 온 ‘조센진’ 뿌리 없는 삶 소설로 아쿠타가와 상 받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62호 35면

재일동포 여류작가 이양지(1955~92)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직후인 1989년 봄이었다(‘아쿠타가와 상’은 일본의 유망한 신인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재일동포로서는 51년 이회성이 처음 수상했고, 이양지에 이어 97년에는 유미리가, 2000년엔 현월이 각각 수상했다). 함께 일하던 여기자와 그의 소설집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 대표인 여성과 함께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는데, 이양지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로 없었으므로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는 건 그가 주로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 소설을 쓰고 있으며, 한국을 좀 더 잘 알기 위해 여러 해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정도였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50> 요절한 재일동포 작가 이양지

이양지는 키는 작달막했으나 얼굴이 희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미인형의 미혼여성이었다. 꽤 오랜 시간 자리를 함께했으나 그는 좀처럼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이런저런 질문에도 “네” “아니요”의 단답형으로만 의사를 나타내 나는 그가 한국어를 전혀 못하거나 겨우 알아듣는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88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이화여대 대학원 무용과에 재학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한국어를 읽고 쓰는 데는 별 지장이 없으나 말은 아직 서투르다”고 출판사 대표가 귀띔했다. 여기자가 일본어로 말해도 간단하게 대꾸하는 것을 보면 되도록 말을 아끼는 성격인 것 같기도 했다.

그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5세이던 80년이었다. 일본 사회에서의 ‘재일 한국인’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제3국인’이라는 데 회의와 갈등을 느껴오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모국을 찾은 것이다. 이듬해인 81년 재외국민교육원의 1년 과정을 모두 마친 이양지는 82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지만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휴학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두 달 만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한국의 전통무용과 가야금을 배우는 일에 몰두하다가 문득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 작품이 ‘군상’ 11월 호에 발표한 ‘나비타령’이었다.

이 작품이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에 오르면서 일본 문단에서 일약 주목 받는 신예 작가로 떠올랐다.

1년에 두 편 정도 발표된 그의 작품들은 매번 일본 문단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고, 83년에 소설집 ‘해녀’와 85년 소설집 ‘각(刻)’을 내놓았다. 서울에서
2년에 걸쳐 쓴 ‘유희(由熙)’라는 작품으로 89년 마침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유희’는 서울에 유학 온 재일동포 여대생의 이름으로 바로 이양지 자신이다. 이 작품은 ‘유희’가 주인공이면서도 하숙집 ‘언니’의 일인칭 시각에 의해 객관화되는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모국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 말보다는 오직 대금 소리에서 모국의 탯줄을 느끼는 ‘유희’- 바로 이양지 자신의 모습이다.

재일동포로 태어난 탓에 이양지의 삶은 일찍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90년 10월 한·일문화교류재단의 초청 강연에서 그는 어렸을 적부터 ‘조센진’이라는 사실이 큰 흉처럼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그의 부모는 40년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산이 바라다보이는 야마나시 현의 작은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비단 행상을 하던 부모의 2남3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는 9살 때 부모가 귀화했으나 정신까지 일본인이 되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때 역사를 배우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회의를 느낀 이양지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한다. 75년 와세다대 사회과학부에 입학하지만 ‘한국인’이라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대학을 중퇴하고 ‘조센진’이 많이 사는 아라카와로 주거를 옮긴다. 그곳에서 가야금을 배우면서 좀 더 한국사람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던 그는 이른바 ‘마루쇼 사건’의 주인공으로 20여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이득현의 구명운동에도 참여한다. 가야금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을 때 마침 공연을 위해 일본에 와있던 가야금병창 인간문화재인 박귀희를 만난 것이 한국에 유학하게 된 계기였다.

‘유희’의 수상으로 일본 문단의 중심에 서게 된 이양지는 원고지 3500장에 이르는 대작의 구상을 끝내고 곧바로 집필을 시작했다. 제목은 ‘돌의 소리’. 중·단편 소설만 발표했던 그에게는 소설가로서의 명운을 내건 중요한 도전이었다. 이 작품 역시 재일 한국인의 고뇌를 다루고 있으나 인간 내면의 심리 묘사에 더욱 역점을 두었다. 모두 10장으로 쓸 계획이었던 듯 1장부터 10장까지의 제목을 미리 붙여두었던 그는 92년 봄 이화여대 대학원을 수료한 뒤 제1장을 출판사에 넘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일본에서 3장의 초반까지 집필하다가 5월 22일 심근경색으로 37세의 삶을 마감했다.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1장의 후반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주홍색으로 빛나는 아침놀의, 그 아름다움에 나는 정신을 잃을 듯한 감동을 받았다. (중략) 그날, 그 새벽의 그 아침놀을 응시하면서 죽음을 느끼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실감하고 있었다.”



정규웅씨는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