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고금통의 古今通義

다문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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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태종실록』 10년(1410) 10월조는 “덕릉(德陵)·안릉(安陵) 두 능을 함주(咸州·함흥) 달단동 언덕에 옮겨 합장했다”고 전하고 있다. 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능이고, 안릉은 그 부인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의 능이다. 이 능자리는 태조 이성계가 직접 골랐는데 달단은 몽골이란 뜻이다.

 원나라 멸망 후 몽골이 대흥안령 서남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달단’이라 불렸다. 함경도에는 몽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달단동이란 마을이 둘 있었다. 홍원(洪原)현 남쪽 30리 지점과 함흥 북쪽 50리 지점에 각각 달단동이 있었다. 몽골 사람들과 뒤섞여 살았다는 뜻이다.

 『태종실록』 2년(1402) 4월조는 “청해군(靑海君) 이지란(李之蘭)이 죽었다… 옛 이름(古名)은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조선 개국 일등공신 이지란의 원래 성은 퉁, 이름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로서 만주족이다. 그 부친은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다. 이지란은 이성계와 결의형제를 맺었고 그 부인도 태조비 신덕(神德)왕후 강씨(康氏)의 조카딸인 혜안택주(惠安宅主) 윤씨(尹氏)였다. 이 시기에는 만주족과 결의형제도 맺고 스스럼없이 혼인도 했다.

 조선에서 통역관을 길러내는 기구가 사역원(司譯院)이었다. 사역원 출신의 역관(譯官)은 단순한 역관이 아니라 국제무역상도 겸했기에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데 태조 3년(1394) 11월 사역원의 교수 숫자와 학생 선발 기준, 수업 과목 등을 마련해 그 기틀을 잡는 인물은 사역원 제조(提調) 설장수였다. 『태조실록』 5년(1396) 11월조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의 관향(貫鄕·본관)을 계림으로 삼게 했다’면서 ‘회골사람’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회골은 현재 중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이 높은 위구르를 뜻한다. 설장수가 마련한 사역원 교육 대상 외국어에는 중국어(漢語)와 몽골어 외에 위구르(偉兀)어도 있었다. 단순히 자신의 출신지라고 수요가 없는데도 위구르어를 채택할 수는 없었다. 설장수의 본관을 계림, 즉 경주로 내려준 것도 의미심장하다. 실크로드의 주요 길목인 위구르 사람들이 신라 때부터 경주에 정착해 살았던 역사를 인정한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원래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았던 다민족·다인종 사회였다.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문화 사회를 껴안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다인종 사회는 우리 사회의 약점이 아니라 세계화 시대의 장점이다.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았던 선조들의 지혜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