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진통제만 처방하는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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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2면

김선하
경제부문 기자

통증이 심할 때 찾는 게 진통제다. 진통제는 대개 ‘마약’ 성분을 함유한다. 통증을 잠시 멈춰줄 뿐, 병을 고쳐주진 못한다. 초등학생도 아는 이런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는 이들이 있다. 대한민국 국회다.

 국회는 지난달 신용카드 우대수수료율을 정부가 정하게 한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뿐인가. 5000만원 초과 예금자의 손실까지 보전해주도록 한 부실저축은행 피해자지원 특별법안도 여전히 국회 계류 중이다. 두 법안의 취지야 나무랄 데 없다. 금융 약자인 영세 가맹점과 부실 저축은행 피해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니. 문제는 두 법안에 들어 있는 ‘마약’ 성분이다. 개정 여전법은 정부가 시장가격을 정하게 해 위헌 논란을 빚고 있다. 저축은행 피해자지원법안은 예금보호 제도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더 나쁜 건 이런 정책은 한 번 쓰면 되돌리기 어렵다는 점이다. 언제든 통증이 도지면 쓰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마약과 같기 때문이다.

 이런 강력한 ‘마약’ 성분 진통제를 처방한 국회지만 막상 치료제 도입엔 눈을 질끈 감고 있다. 9일 국회 의원회관에선 씁쓸한 공청회가 하나 열렸다. 한국금융연구원과 새누리당 김영선·권택기 의원이 함께 개최한 ‘금융소비자보호 강화를 위한 입법방향’ 공청회다. 정부안에는 꺾기나 무책임한 상품 판매를 일삼는 금융사엔 과징금을 매기는 내용이 포함됐다. 금융사가 분쟁조정 절차를 피하려 소비자에 대한 소송을 남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도 있다. 금융감독원 안에 금융소비자보호원을 별도로 두는 내용도 담겼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법안 두 건(금융소비자보호법 제정안, 금융위원회 설치법 개정안)은 지난달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로 넘어간 뒤 한 차례의 논의도 이뤄지지 못했다. 국회가 여전법·저축은행법 같은 진통제 처방에만 매달렸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다음 달 총선 뒤로 예정된 18대 국회의 마지막 임시국회에서 의원들을 설득해 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미 물 건너갔다는 관측이 많다. 선거 끝난 뒤의 국회만큼 맥 빠지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총선 뒤 임시국회는 18대 국회가 정말 금융 약자를 생각했는지 아닌지를 마지막 판가름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