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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어떤 아름다운 가능성을 찾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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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호 27면

자유테크놀로지(FAT) 외, ‘Eye Writer’, 2009 - 눈동자만을 움직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 시각 보조장치다. 루게릭병에 걸린 친구를 위해 아티스트 자카리 리버만 등이 개발했다. 소프트웨어 코드를 공개해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

“디지털시대의 인간은 새로운 차원의 의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개인의 의식이 연결돼 지구적 의식이 창발할 것이며, 이는 집단지성의 형태로 드러날 것입니다.” 1990년대 중반 만난 철학자 피에르 레비는 이성적이며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했다. 인터넷과 함께 등장한 사이버 세상은 레비와 같은 지성은 물론 기업가·예술가·엔지니어·교육자 등 많은 사람에게 신천지를 제시했다. 정보의 생산·유통·소비가 달라진다는 것은 그것에 기반한 사회의 제반 제도는 물론 인간의 의식 구조까지 바뀜을 의미한다. 모든 게 달라지는 세상, 그것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시대의 안테나, 디지털 아트 <12> 연재를 마치며

지난 20여 년간 인류는 ‘양날의 칼’을 봤다. 한편으로는 개방성, 투명성,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혁명’ 식의 민주성이 확대됐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모든 권위가 무너지고, 진실과 허구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개인과 사회는 방향감을 잃게 됐다. 길은 뻥뻥 뚫렸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다들 헤매고 있는 것이다. 진보란 어디로 가는 거지? 이 시대에 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뭐든 공짜로 가는 것도 좀 이상하고, 그렇다고 부의 축적이 더 이상 유일한 가치기준도 아닌 세상에서 모두가 좌불안석이다.

이이남, ‘이사야서 53장’, 2010 -스마트폰으로 십자가를 비추면 영상과 소리를 체험할 수 있는 증강현실 작업의 하나다. 

우리 시대를 일컫는 신조어들도 등장했다. 광통신과 함께 도래한 속도의 세상에서 숨 돌릴 겨를도 없는 우리 앞에 ‘통섭’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나타났다. 뭔가 한 줄기로 꿰라는 뜻인 것 같은데, 개미의 행태를 잘 들여다보면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말인가? 나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던데. 한 분야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힘든 세상에서 옆 동네 것도 알아보라는 주문은 깊이보다 넓이를 존중하는 세태를 반영한다. 속도의 세상에서는 ‘넓이’가 중요하다. 누가 빨리 넓게 얇게 펼치는가의 게임인 것이다.

필자처럼 주의 산만하고 호기심 많은 사람에게 이런 세태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지난 10여 년간 활개치고 다녔다. 소위 기술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기치 아래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이다. 세어 보니 1000명이 넘는 작가와 엔지니어, 프로그래머, 디자이너와 협업해 수백 개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 나도 모르게 ‘융·복합’의 최전선에 서 있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도대체 이런 것들을 왜 자꾸 만드는 거지? 다 어디에 쓰려고?”

인간의 생산성이 이미 본연의 욕망을 넘어섰음에도, 기계와 결합된 새로운 욕망은 배부름을 모른다. 끝없는 자기증식의 루프를 돌고 있는 기계적 욕망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로움은 더 이상 새롭지 않고, 오히려 철 지난 것이 새로울 정도다.

정보폭발시대를 사는 오늘날 지구인에게 공통된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혼돈’일 것이다. 레비의 쿨한 집단지성보다는 네티즌의 일상적인 집단감정으로 인터넷은 뜨겁다. 이는 비록 억지스럽고 빈약하긴 했지만, 선형적인 이야기 구조-흔히 ‘역사’나 ‘이데올로기’라 부르는 것들-가 무너져 버린 결과다. 아직도 역사 속에 갇힌 사람들을 우리는 ‘꼰대’라 부른다. 역사 밖으로 뛰쳐나온 아이들은, 그러나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미래를 전혀 알 수 없는 전대미문의 불안을 대가로 치르며 살고 있다.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리한 친구, 스티브 잡스는 일찍이 간파했다. 그의 디자인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첫째는 단순함(Simplicity), 둘째는 영성(Spirituality), 그리고 터치(Skinship). 지식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귀한 것은 지혜다. 그 지혜는 단순함과 영성을 추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잡스는 알았던 것 같다. 신비감을 주는 제품 디자인으로 단지 영성을 표방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샀다. 그는 또한 비물질적인 정보세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우리는 스킨십을 갈망하게 된다는 것도 알았다. “바보야, 화려한 기능이 아냐. 터치란 말이다, 터치!”

잡스가 3S로 지구촌의 마음을 사로잡아 갈 때 우리는 그의 기기를 통해 미친 듯이 서로 연결해 가고 있다. 페이스북이건, 구글이건, 혹은 수많은 앱들이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가히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속도와 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연결의 끝은 어디일까? 융·복합 기계가 온통 세상을 한 종류의 ‘섞어찌개’로 뒤덮을 때까지 계속될 것인가? 혹 다른 어떤 아름다운 가능성과 대안이 존재하지는 않을까?

그 ‘다른 어떤 아름다운 가능성과 대안’이 디지털 아트가 존재하는 이유다. 단순함과 영성, 그리고 터치를 추구함은 애플의 잡스와 비슷하나 동기와 방향이 다르다. 장터에서 큰 소리로 호객하는 대신 디지털 아트는 개개인에게 조용히 다가간다. 사람들을 모아 제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뒷길을 가르쳐 줌으로써 오히려 탈제국을 꿈꾸게 한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자유가 외로움과 불편함을 능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으로 나온 희망처럼 혼탁한 세상에서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후기:디지털 아트에 관한 열두 번의 연재를 마칩니다. 저의 형편없는 필력으로 디지털 아트를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 주위에 가끔씩 ‘미세한 음성’으로 다가오는 주목해 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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