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깨달음’ 없이 읽는〈도덕경〉

중앙일보

입력

"하나의 물건도 집어들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내려놓아라.”/“아무 것도 집어들 수 없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그럼 가져가거라.”

12세기 중국 선종 불교의 승려인 원오극근(圓悟克勤)이 말한 공안(公案), 즉 화두다. 얼핏 들으면 멋진 이야기, 그러나 그런 방면에 감수성이 발달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저 재치있는 유머일 뿐이다. 수양이 부족해설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그 화두를 나 못지 않게 수양이 부족해 보이는(?) 어느 서양인의 글에서 읽었다.

몇 해 전 불교계 일각에서 돈오돈수(頓悟頓修)냐, 돈오점수(頓悟漸修)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점진적인 깨달음, 즉 점오(漸悟)도 어려운 판에 순간적인 깨달음(頓悟)을 얻은 다음에는 어떻게 수련할 것이냐(즉 돈수냐, 점수냐) 하는 문제를 논하고 있으니, 깨달음조차도 곱씹어 생각하는 버릇을 가진 나로서는 언감생심 관심을 가질 수도 없는 논쟁이었다. 닦음(修)을 위해 깨달음(悟)이 필요할까, 아니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닦음이 필요할까? 아는 만큼 보는 걸까, 보는 만큼 아는 걸까?

화두는 원래 선종 불교에서 자주 쓰는 것이지만, 사실 동양 사상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딱히 불교적인 것이라고만 할 순 없다. “말할 수 있는 도(道)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덕경〉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말도 일종의 화두다.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한다면 난 사실 그런 화두나 선문답 따위를 그다지 믿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도는 왜 영원한 도가 아닐까?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왜 영원한 이름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란 무슨 특별한 재능을 가졌거나 수양을 거친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비밀스런 교의라도 된단 말일까? 대체 그런 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도 그것을 강의한 방송이 인기를 끌고 그것을 풀이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이유는 뭘까? 물론 김용옥 씨의 찢어지는 목소리와 화려한 쇼맨십은 별개의 세일즈포인트다.

선문답이나 화두는 멋있어 보이지만 추상적이다. 추상적인 건 아무래도 해석이 분분하게 마련이다(그래서 그 해석으로 먹고 사는 사람도 많다). 예컨대 그리스도교의 성서에 무수한 주석이 주렁주렁 달리는 이유는 성서의 내용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많은 군중을 먹였다는 기적은 말 그대로의 뜻일까, 아니면 어떤 사건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걸까? 하지만 예수의 기적보다 화두가 더 위험한(?) 이유는 차라리 종교처럼 노골적이지 않고, 사기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속으론 추상적이면서도 겉으론 구체적인 앎(깨달음!)이 있는 듯 표방한다는 점이 그렇다.

화두를 읽고 대번에 깨달음을 얻은 듯 여기는 태도는 대부분 화두를 장식하는 역설적인 표현의 매력에 속아넘어간 탓이다. 알다시피 모든 역설은 정설이 있기에 존재한다. 도는 ‘일단’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이름은 ‘일단’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경〉의 첫 구절은 이렇게 써야 더 정확해진다. “말할 수 있는 도도 있지만 영원한 도는 굳이 말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부를 수 있는 이름도 물론 좋은 이름이지만 진짜 영원한 이름은 부를 수 있고 없고와 무관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재미가 없고 재치가 부족하므로 깨달음을 얻기 어렵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결국 말장난이 주는 재미에 불과한가?

나는 말과 무관한 깨달음이란 없으며, 개인과 개인 사이에 텔레파시나 불립문자 같은 것도 없다고 믿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데카르트처럼 자기 안의 확실성(“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더 솔직한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더 진지한 〈도덕경〉의 해석은 이렇다.

〈도덕경〉의 가르침은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그냥 ‘묻지 마!’가 아니다. 도의 근원은 ‘어둠’이고, 어둠은 곧 ‘신비의 문’이다. 진실하고 영원한 것은 어둠 속에 있을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덕경〉은 모든 걸 신비 속에 파묻는 것과는 정반대로 신비 속에서 모든 걸 찾으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한다.

세상 만물의 근원에는 ‘도’가 있다. 만물은 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존재하지만, 인간은 욕심으로 그 도에서 벗어나고 오히려 도를 거스르고자 한다. 세상을 망치고 악행을 일삼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세상을 고치고 선행을 하고자 하는 의욕도 역시 인위적인 욕심에 불과하다. 인위가 빚어낸 무질서와 혼란을 극복하려면 아무 욕심도 없고(無慾)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無爲), 즉 무위자연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성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즉 무위자연을 택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순전히 정적인 상황인 것만이 아니듯이 무위자연 역시 소극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말하지 않는 것, 즉 침묵과 어둠 속에 있다. 사람들은 소리와 빛은 보지만 침묵과 어둠은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볼 줄 아는 안목과 인식을 갖추면 그때부터의 행위는 무위자연의 ‘적극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바로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을 쓸모있게 만드는 것은 그릇 속의 빈 곳”이라는 깨달음이다(그런 점에서 김용옥 씨의 ‘요란함’은 〈도덕경〉에 대한 정면 부정이나 다름없다).

사실 이렇게 해석한다면 〈도덕경〉의 가르침은 서양 철학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를테면 실재(presence)의 심층에 있는 부재(absence)의 의미를 강조하는 구조주의의 인식론이기도 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 〈어린 왕자〉의 교훈이기도 하다. 차이가 있다면 〈도덕경〉은 해석자들이 지나치게 부풀리는 바람에 오히려 그 의미가 퇴색하는 반면, 구조주의와〈어린 왕자〉는 굳이 그런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에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한다는 점일 것이다.

남경태 (dimeola@chollian.ne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