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경제 르포] 햇살론 받는 데 한 달 … 대출 꿈도 못 꿔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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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돈줄이 말랐다. 서민을 유혹하는 건 대부업체뿐이다. 서울 영천동 재래시장에 불법 대부업체 광고가 여럿 붙어 있다. [안성식 기자]

“저축은행이고 뭐고 빌려주는 데가 없어요. 여기서 금융권 대출받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겁니다.”

 6일 낮 서울 서대문 영천시장. 시장 어귀에서 33㎡짜리 식당을 운영하는 이은모(60)씨는 “대출받기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정부가 지원하는 서민금융이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얼마 전 문 닫은 인근 횟집 얘기를 꺼냈다. “은행과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거부당해 마지막으로 미소금융을 신청했지만 그것도 안 돼 결국 망했다”고 했다. 인근에서 만난 황모(65·여)씨도 거들었다. 서울 북아현동에서 속옷 가게를 하고 있는 그는 “서민금융 서류가 워낙 까다로워 주변에서 대출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서민을 대상으로 한 정책금융이 길을 잃고 있다. 정작 대출이 필요한 서민들에게 새희망홀씨와 햇살론·미소금융 등 대표적 서민대출은 남의 얘기로 들린다. 정부의 강권으로 한도는 늘려 놓았지만 금융사들이 까다로운 조건으로 문턱을 잔뜩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인근의 은행지점 5곳을 둘러봤다. 신용등급 7등급, 연소득 2000만원인 자영업자라고 했다. 대출 상담을 요청하자 5곳 모두 자사 신용대출을 안내하며 “그 정도 소득으론 어렵다”고 했다. 새희망홀씨와 햇살론 대출도 비슷했다. 국민은행 창구직원은 “새희망홀씨 대출 승인은 힘들다. 된다 해도 금리가 연 15%는 될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정한 새희망홀씨의 상한금리는 연 14%다. 농협 직원은 “햇살론은 어딜 가도 거의 신청을 안 받을 것”이라고 했다. “된다 해도 신용보증재단 보증서를 받는 데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외면당한 서민들을 유혹하는 건 대부업체들이다. 영천시장 거리에서 10분간 주운 광고 명함만 20장을 훌쩍 넘었다. 시장 상인 김모(78·여)씨는 “작년에는 하루에 10장 좀 넘게 받았는데 올해는 30장이 넘는다”고 전했다. 시장에서 만난 전직 대부업자는 “대출금리가 연 60%가 넘고 연체이자는 더 높지만 돈 빌릴 곳이 없는 서민들은 일수라도 빌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서민 정책금융을 운영하는 금융사들은 실적 부진으로 머리를 싸맬 지경이다. 2금융권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햇살론’은 지난해 목표했던 2조원의 24%밖에 대출하지 못했다. 지역신용보증재단으로부터 대출액의 85%를 보증받는 데도 그랬다. 이의수 신용보증재단중앙회 경영전략본부 부부장은 “취급기관들이 연체율이나 부실을 이유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은행의 새희망홀씨는 숫자 채우기에 급급하다. 지난해 16개 은행은 새희망홀씨 대출로 1조3655억원을 내줬다. 목표액을 채웠지만 ‘저신용자 지원’이라는 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한 은행 관계자는 “부실을 은행이 모두 책임져야 해 내부적으로 신용등급 4~6등급 사이 고객을 주로 상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소금융 역시 창업자금으로 용도가 제한돼 있고 조건도 까다롭다. 대출에 어려움을 겪는 7등급 이하 저신용, 저소득자가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서민금융의 한 축을 맡아오던 대부업체 돈줄도 마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형 대부업체들에 대한 영업정지가 예고되면서 이들의 영업이 사실상 중단된 탓이다. 월 평균 5000억원가량이던 대부업계의 대출 규모는 지난해 12월 3600억원 규모로 급감했다. 정찬우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축소된 가계대출을 다 소화하기에는 서민금융 규모가 충분하지 않다”며 “일정한 의무 대출 비중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대비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혜미·한영익 기자

3대 서민금융

저소득·저신용자를 위해 일부 기관에서 생활안정자금·창업자금·주거안정자금을 낮은 금리로 대출해 주는 제도. 대표적인 3대 서민금융상품에는 미소금융·햇살론·새희망홀씨 대출이 있다. 미소금융은 각 금융회사의 휴면예금(기부금)을 바탕으로 하며 햇살론과 새희망홀씨 대출은 각각 서민금융회사(농협·새마을금고·신협·저축은행 등)와 국내은행이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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