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위기서 지역 명문고로 거듭난 경남 남해해성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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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달린 지 4시간20분. 바닷가가 눈앞에 펼쳐졌다. ‘경남 남해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란 표지판 뒤로 보이는 건 간간이 들어선 주택뿐이었다. 버스를 내려 택시로 갈아탔다. 20여 분 지나니 경남 남해해성고가 보였다. 주변에 학원은 커녕 변변한 음식점 하나 없는, 전형적인 시골학교였다. 한 학년은 고작 100명 남짓. 그런데 이 학교가 2012학년도 대학입시에서 93%의 대학진학률을 기록했다. 졸업생 103명 중 96명이 대학에 합격했고, 그 중 41명이 고려대·연세대를 비롯한 서울·수도권 대학에 붙었다.

남해= 최석호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남해해성고는 올해 대학입시에서 시골학교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토요일은 물론 방학까지 반납하고 학생지도에 헌신한 교사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왼쪽부터 이병희?고정현?임종운 교사. [김진원 기자]

남해해성고를 찾았을 때 졸업식도 끝난 3학년 교무실에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학부장을 포함한 3학년 담임교사들이 모여 올해 3학년이 될 학생들의 학교생활기록부와 모의고사 성적을 살피고 있었다. 학생 개인별 학업 취약점을 분석하는 등 대입 지원전략을 짜고 있었던 것.

이 학교엔 방학이 없다. 토요일도 쉬지 않는다. 경남지역 958개 초·중·고교 중 주 5일제 수업을 하지 않는 곳은 남해해성고가 유일하다. “이 지역엔 학원이 없잖아요. 우리 애들 공부시킬 사람은 우리 학교 선생님들밖에 없어요. 남보다 더 열심히, 오랜 시간 공부시켜야 살아남을 수 있죠.” 이병희(36) 진학부장의 말이다. 토요일은 물론 방학기간에도 학기와 똑같이 수업을 진행한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교사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수준별 수업을 개설한다. 같은 성적대의 학생 5~7명이 모여 소수정예식으로 수업을 듣는다. 한 달 단위로 개설되는 국어·영어·수학 강좌 수만도 10개가 넘는다.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는 학년별로 2명의 교사가 남아 학생들의 학습질문을 받는다. 한 학년 교사가 4명뿐이라 교사 1명이 이틀에 한 번꼴로 야근을 하는 셈이다. 기숙사 생활을 관리하는 사감 6명도 모두 교사다. 올해 연세대 행정학과에 합격한 이태영(19)군은 “자율학습 시간은 물론 기숙사에서까지 선생님에게 질문하면서 모르는 부분을 이해하고 정리한 게 점수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고교 입학 때 치른 모의고사 언어·외국어 성적이 각각 4, 5등급이었지만 수능시험에선 모든 영역에서 1등급을 받았다.


이 학교가 이러한 진학실적을 올리게 된 데는 ‘멘토링 프로그램’ 도 한몫 했다. 교사 1명당 학생 7~9명을 맡아 입학부터 졸업까지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교사는 물론 교장·교감, 행정실 직원까지 모두 나서 학생들과 교감한다. 멘토 교사는 적어도 1주일에 한 차례씩 멘티인 학생들을 불러 고민을 듣고,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매달 한 차례 ‘멘토링 데이’ 땐 멘토·멘티로 묶인 교사와 학생들이 만나 식사를 하면서 정을 나눈다. 같은 멘토링 그룹의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자신의 공부법을 전수하고, 후배는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며 ‘한 가족’이 된다. 최성기(52) 교장은 “체육대회, 과학퀴즈대항전 등 학교 행사에서 멘토링 그룹별로 팀을 짜기 때문에 결속력이 높다”며 “학생들이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가지면 성적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사들은 자신의 멘티 학생들을 ‘내 새끼’라고 부른다.

6년 만에 지역 명문고 탈바꿈

남해해성고가 있는 경남 남해군 남면은 면소재지로부터 2㎞ 떨어진 농촌마을이다. 1993년까지 이 지역에 6개 있었던 초등학교가 2004년 들어 남명초 1곳을 남기고 모두 폐교됐다. 젊은 층이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학생이 끊겼기 때문. 같은 이유로 전교생 141명, 6개 학급에 불과했던 남해해성고도 2005년 폐교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2005년 11월 당시 남해군수였던 하영제씨가 남해해성고와 인접한 ‘힐튼남해 골프 앤 스파리조트’를 운영하는 에머슨퍼시픽 이중명(69)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리조트 근처 한 고교가 학생이 없어 문을 닫게 될 지경이란 얘기를 듣고 ‘남해에서 밥 먹고 사는데, 내가 이 지역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했지”라며 학교를 인수하기로 했다. 이 회장의 할아버지가 교육감을 지냈고, 아버지도 교장 출신이라 교육에 관심이 있던 터였다.

2006년 3월 해성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그가 처음 했던 일은 기숙사 신축이었다. ‘먹고 자는 걱정 없이 공부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42억원의 사재를 털었다. 2008년부턴 다양한 장학금을 지원하면서 서울대·고려대·연세대·KAIST·포스텍 합격생들에게 대학등록금을 지원했다. 지난해 재단이 학생들에게 준 장학금은 8570만원에 달한다. 지원한 대학등록금만도 6000만원이 넘는다. 그 결과 2005년까지 입학생들의 중학교 평균내신이 60~70%대였던 이 학교는 6년여 만에 10%대 내신성적을 가진 학생들이 입학하는 지역 명문고로 탈바꿈했다. 2009년부터는 학급 수도 12개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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