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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리쥔과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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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형규
베이징 총국장

이달 초 발생한 왕리쥔(王立軍) 중국 충칭(重慶)시 부시장 사건은 스릴의 완결판이다. 보시라이(薄熙來) 충칭 당서기의 오른팔이었던 그가 주인을 ‘최고의 간신’이라 공격한 것도 ‘쇼킹’인데 변장하고 미국 영사관 진입까지 했다. 여기에 황치판(黃奇帆) 충칭시장이 “괘씸한 왕을 잡겠다”며 무장경찰과 장갑차까지 이끌고 쓰촨(四川)성 청두(成都)까지 300㎞를 돌진한 장면에 이르면 21세기판 ‘삼국지(三國志)’가 따로 없다. 특히 보 서기가 올가을 중국 권력 최고지도부 진출이 유력했던 점과 미국의 조연까지 곁들이면 영화로 만들어도 대박 예감이다. 사건의 단초야 권력투쟁일 수도 있고 왕의 인사 불만일 수도 있다. 또 특정 개인비리의 연장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건의 등장인물과 그 전개과정의 긴박감은 세인의 구경거리로 충분했다. 한데 한국에 이 사건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재미로 즐길 일은 아닌 듯싶다.

 저돌적(?)인 황 시장이 지난달 30일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해 포스코와 삼성전자를 찾았다. 이미 진행 중이었던 두 기업의 충칭시 투자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저녁에는 몇몇 기업인들과 소주까지 얼큰하게 곁들였다. 다음 날 두 기업에 대한 최고의 대우 약속과 함께 충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데 이틀 후 갑자기 왕 부시장이 시 공안국장에서 해임되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왕의 보 서기 공격→왕의 변장과 미 영사관 진입→황 시장의 무장경찰 동원과 미 영사관 포위→당국의 관련자 조사라는 파노라마가 연출됐다.

 비상은 포스코부터 걸렸다. 이미 충칭제철과 30억 달러 합작투자에 합의했고 제철소를 짓기 위한 중앙정부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건이 터졌다. 보 서기와 황 시장 도움 없이 중앙정부의 투자허가를 받기가 녹록하지 않은데 둘 다 ‘내 코가 석 자’가 돼 버린 거다. 답답한 포스코의 한 고위 간부가 말했다. “글쎄 우리에게 이번 사건은 ‘재미’가 아니라 피 말리는 ‘긴장’이라니까.”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 공장 부지를 고르던 삼성도 고민이다. 이달 초 서울에서 실사단을 보내 충칭의 공장 부지를 조사하는 와중에 사건이 터졌다.

 삼성은 베이징(北京)과 시안(西安)·톈진(天津) 등 다른 대안 도시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거대 서부시장을 고려하면 충칭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아깝다. 그래서 그저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기다려 볼 수밖에 없는 처지다. 비단 두 기업만의 일이 아니다. 리튬형 전지 부품공장 투자를 결정한 SK, 4기 투자를 고려 중인 한국타이어, 공장 착공에 들어간 풀무원 등 8개 기업도 이번 사태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사람이 바뀌면 정책도 바뀔 수 있는 거다. 중국인들이 흔히 한국과의 관계를 ‘일의대수(一衣帶水)’, 즉 한 줄기 띠의 좁은 냇물처럼 가깝다고 했는데 그 함의를 알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도 무심코 흘려버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