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생활 속의 종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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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7월 말 탈북자 468명이 항공편으로 무더기 입국했다. 중국의 단속을 피해 동남아 지역으로 몰려든 탈북자를 더 이상 외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전세기 2대에 나눠 실어 왔다.

 문제는 북한의 반발. “계획적 납치 유인”을 주장하며 “6·15 공동선언 위반”이란 비난까지 쏟아냈다. 북한에 공을 들이던 외교안보라인은 당황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며칠 뒤 ‘탈북자’란 용어에 문제가 있다며 개칭을 지시, 결국 ‘새터민’으로 바꿨다. ‘북한을 탈출했다’는 정치적 의미는 탈색됐고 ‘새 터전에 자리 잡은 사람’이란 뜻만 남았다. 북한 눈치보기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김대중·노무현 정부 대북정책을 ‘잃어버린 10년’이라 비판했다. 당당한 대북정책을 공언했다. 하지만 4년간 성적표는 초라하다. 지난 한 달 북한 관영매체가 대통령을 ‘역적패당’이라며 250차례 비난했는데도 소신껏 따지고 든 장관이나 당국자가 없다. 김정일 사후 탄력이 붙은 3대 세습도 정곡을 찔러 비판하지 못한다. 중국 내 탈북자 강제 북송이나 식량난, 핵·미사일 문제의 뿌리가 봉건왕조식 권력세습과 수령독재란 걸 모를 리 없는데도 말이다. 청와대 외교안보 책임자가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되신 분”이라고 표현하는 판이니 세습 비판을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인 듯싶다.

 북한 눈치 보기와 따라 하기는 정부 정책이나 당국자의 입에만 머물지 않는다. 재판정에서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외친 한 종북사이트 운영자나 친북 글을 올린 항공사 기장은 우리 사회에 파고든 종북(從北)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종북과 친북(親北)을 아우르는 ‘종친회(從親會)’란 표현이 등장할 정도다.

 생활 속으로 슬며시 파고든 종북의 단면은 이름이나 명칭을 북한식 그대로 따르는 일부 언론 보도에서도 드러난다. 김정은 체제의 실세 이영호 총참모장을 ‘리영호’로 쓰는 식이다. 이런 방식을 고집한다면 이산상봉 보도 때 ‘남한의 아버지 이길동씨가 북에 두고 온 딸 리춘향을 만났다’는 식으로 부녀의 성(姓)이 달라져야 할 판이다.

 함북 나진을 ‘라진’으로 쓰는 등 지명표기도 문제다. ‘통일된 방안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서로 각기 표기방식으로 쓴다’는 남북 간의 합의에도 어긋난다. 북한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북한 표기 따라 하기가 번지는 추세다. 북한 원전에 충실하겠다는 뜻은 좋지만 인용구가 아닌 곳에서도 굳이 ‘로동신문’ 등으로 써야 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북한이 자기식 표현을 고집하는 판에 우리만 북한에 맞춘다는 건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 김일성이 6·25 때 전사한 혁명동지 김책(전선사령관)의 이름을 따 개칭한 김책시(옛 성진)처럼 곳곳에 널린 우상화 지명의 표기도 문제다. 전문가들은 옛 이름을 함께 표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언론단체와 북한학계·어문학계가 나서 북한 지명·인명을 올바르게 표기할 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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