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시론… 경제 진단] 구태 못벗은 정책운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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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는 이번에 금융 구조개혁을 위해 공적자금 40조원을 추가 조성키로 했다.

지난 2년간 투입한 1백10조원과 합하면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30%에 해당하는 1백50조원의 공적자금이 금융 구조조정에 투입되는 것이다.

*** 미시적.단기적 해결 급급

1980년부터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약 70여개 국가가 금융위기를 경험했고, 평균 GDP의 10% 정도를 공적자금으로 썼다.

97년 경제위기를 겪었던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GDP의 58%를 쓴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한국이 가장 많은 금융 구조조정 비용을 지불한 것이다.

한국 정부는 이번이 마지막 공적자금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17개 은행이 공식적으로 밝힌 무수익 여신만도 올 3월 말 현재 27조원에 이른다.

한국 전체 금융기관의 총여신 5백90조원의 20%인 1백20조원 정도가 부실여신이어서 정부의
장담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게다가 경제가 10.7%의 실질 성장을 하고, 이자율이 비교적 낮았던 지난해에도 한국 상장기업들의 20% 정도는 영업수익이 이자비용에도 못미쳤다.

고유가.금융시장의 마비로 6%대 이하의 경제성장률이 예측되는 올 하반기에는 더 많은 부실여신을 금융기관들이 떠안을 것이다.

요즈음 한국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제2의 경제위기 논란이 일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사태는 외환위기로 시작돼 금융.실물경제의 위기로 파급됐다.

그러나 지난 20여년간 세계 각국의 경제위기는 대부분 국내 금융위기에서 시작돼 외환위기로 번졌다.

따라서 한국은 IMF사태를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금융위기를 먼저 맞고, 이에 놀란 해외금융기관.외국투자가들이 급격히 철수하는 제2의 환란을 맞을 개연성이 커지고 있다.

누적된 부실채권과 취약한 자기자본비율로 고전하는 한국 은행들은 2차 금융 구조조정의 칼날 앞에서 전전긍긍하면서도 무사안일로 일관해 금융시장 중개기능을 상실했다.

투신사 등 종합금융업계의 부실로 사채시장은 6월부터 사실상 마비된 상태고, 증시 폭락으로 기업의 자금줄도 막힘으로써 한국은 '금융경색 대란' 을 당하고 있다.

현 정부는 IMF사태 속에서 '준비된 경제대통령' 에게 희망을 걸고 출범했다. 따라서 경제문제 해결은 현 정부의 최대 과제다. 그러자면 정부는 먼저 경제정책의 기본적인 혼선을 없애야 한다.

한국은 지난 2년 동안 세계은행.IMF의 권고를 충실히 받아들여 금융.자본시장 개방, 회계제도 투명성 확보,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도입 등 선진화한 국제규범을 많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선진제도를 실천해야 할 경제관료들은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정책을 수행, 경제
운영에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정부부처 책임자의 주업무는 거시경제를 건전하게 운영, 21세기에 걸맞은 국제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관료들은 아직도 미시적이고 단기적인 위기 해결사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들은 급한 불부터 끄자며 대우 등 부실기업에 돈줄을 끊지 말도록 금융기관에 강요,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늦춰왔다.

침체한 채권시장을 활성화하겠다며 10조원의 채권펀드를 조성, 반강제적으로 금융기관들의 출연을 유도하고 있고 연말까지 10조원을 추가조성할 방침이라고도 한다.

80년대에 침체한 주식시장의 부양을 위해 투신사에 압력을 넣어 주식투자펀드를 조성, 오늘날 투신업계의 부실을 자초한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다.

*** 官治.도덕적 해이 여전

정부는 아직도 금융권 인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한다. 구조조정된 금융기관의 퇴직임원이 부실경영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국민의 혈세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중인 회사의 임원으로 재등장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 있다.

GDP의 2% 정도를 공적자금으로 투입했던 미 저축은행들의 위기 때 1천8백50명이 기소되고, 1천6백명이 형사처벌을 받았던 미국과는 상황이 너무도 다르다.

경제체제는 개방됐는데도 구태의연하게 정부 주도식으로 운영하다가 경제난국을 초래했고, 이어 제2의 위기론까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일단 글로벌 경제체제를 수용했으면 정책운용도 이에 맞춰 변해나가야 한다.

박윤식 <미 조지 워싱턴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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