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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기업 판정 기준]

중앙일보

입력

부실기업 '살생부(殺生簿)' 격인 판정기준이 은행에 전달됐다.

이에 따라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기업을 포함한 1백50~2백개 기업의 생사 여부가 이달말께 판가름나게 됐다. 특히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5~6개 재벌 모기업도 공개심판을 피할 수 없게 돼 파문이 클 전망이다.

그러나 판정기준 적용작업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란 예상도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정부가 제시한 기준이 막연해 은행별로 세부기준이 엇갈릴 가능성이 커 형평성 시비가 우려된다.

◇ 애매한 판정기준=금융감독원이 제시한 기준은 세 가지뿐이다.

그러나 이 기준에서도 최근 3년간 이자보상배율을 1997~99년 말로 해야 할지, 올 6월 말 실적까지 포함시킬지를 은행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12월 결산기업 가운데 3년 연속 이자보상배율이 1에 못 미치는 기업은 1백10개를 넘어선다.

그러나 은행들이 심사대상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능한 한 기업에 유리한 쪽의 자료를 택할 것으로 보여 실제로 대상에 오4?기업은 다소 달라질 수 있다.

각 은행이 자체 관리하고 있는 부실징후기업도 주관적 판단이 들어갈 여지가 있다. 세부기준을 정하는 과정에서도 은행별 대출정책의 차이를 인정하겠다고 금감원은 밝혔다.

이는 같은 돈을 빌려줬어도 판정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어서, 여러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기업의 경우 은행별로 생사판정이 엇갈릴 가능성이 커 논란이 예상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여신 5백억원 이상 기업이라면 관련 은행이 10개까지 나올 수 있다" 며 "은행간에 평가가 엇갈릴 경우 이를 조정할 기구가 필요한데 이런 기구를 따로 만든다면 결국 워크아웃과 달라질 게 뭐가 있느냐" 고 꼬집었다.

◇ 재벌 모기업 퇴출 여부가 관건=이번 기업구조조정의 성패는 그동안 쉬쉬해온 5~6개 재벌 모기업의 처리에 달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외국계 증권사 관계자는 "워크아웃 절차가 있는 데도 굳이 일률적인 생사 여부 판정작업을 벌이는 이유는 그동안 악성 루머의 진원지가 돼온 재벌기업 5~6곳을 이번 기회에 수술하는 데 의의가 있다" 며 "이 결과에 따라 외국인투자자들의 평가가 달라질 것" 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금융계에선 은행권 자율로 이런 수술이 가능할지 회의적인 시각이 없지 않다. 한 시중은행 대출담당자는 "그동안 악성 루머에도 불구하고 자금난을 겪고 있는 재벌 모기업을 살려둔 데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었다" 며 "순전히 경제적 요인만으로 생사 여부를 판단해 퇴출시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고 털어놓았다.

그는 "현재 겉으론 멀쩡한 기업을 퇴출대상으로 분류할 경우 해당은행은 곤욕을 치러야 하는데, 이에 대한 인센티브는 없다" 며 "해당은행과 담당자에게 면책보장과 공적자금 지원 등의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고 지적했다.

◇ 앞으로의 일정과 문제=각 은행은 이번주 중 10명 안팎의 평가위원회를 구성한다. 금감원은 평가의 공정성을 위해 이 평가위원회에 대출담당 임직원의 참여를 금하기로 했다.

은행별 세부기준은 늦어도 다음주까지 작성, 10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평가가 끝난 뒤 정상영업이 가능하거나 일시적 자금난을 겪고 있는 기업으로 분류된 곳에는 채권단의 자금지원이 이뤄진다.

자금난이 구조적인 기업의 경우 대주주의 경영권을 박탈한 뒤 출자전환 등 지원을 해주거나 그것도 불가능할 경우 퇴출절차를 밟게 된다.

그러나 지원대상으로 분류된 기업에 자금이 제대로 지원될지 여부는 미지수다. 워크아웃이 정부의 수차례 점검에도 불구하고 채권단의 비협조로 삐걱거렸던 것을 감안하면 채권단의 일사불란한 지원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1월부터는 은행들이 구조조정 바람에 휩쓸려 '제 코가 석자' 인 상태에서 장래가 불투명한 기업에 '책임지고' 대출을 해줄지 의문이란 지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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