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펀드] 中. 투신사 구태 벗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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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사들이 고객 돈을 만만히 보지 않았다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돈을 끌어들이는 데만 열을 올리고 운영내역 조차 제때 안 알려주는 게 어디 책임있는 금융기관입니까. "

지난해 8월 A투신의 주식형 수익증권에 1천만원을 투자했다 지난 9월 말 6백80만원을 찾은 金모(48.여)씨는 며칠 전 본사로 전화해 이같이 울분을 터뜨렸다.

요즘 투신사 영업점에 가면 고객들의 항의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만큼 펀드 수익률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 투신사 구태 벗어야〓본지에 펀드시리즈가 시작된 4일 투신협회는 "왜 신문사에 펀드수익률 자료를 내줬느냐" 는 투신사들의 항의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 자료는 투신협회가 매주 발간하는 '주간 투자신탁가격정보' 라는 책자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미 공개된 자료도 불리하면 무조건 덮으려는 투신사들의 행태는 투명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특히 채권거래의 경우 전화로 가격을 정하는 상대 매매인 만큼 투신사들이 담합할 가능성이 여전히 많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국펀드평가 우재룡 사장은 "장부가 채권 펀드의 수익률을 맞춰주기 위해 장부가 펀드에 속한 채권을 시가 펀드에서 시가보다 높은 가격에 사주는 경우가 많다" 며 "투신사들이 인터넷으로 이같은 거래내역을 공시한다고 해도 펀드운용 상황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투자자들은 실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고 말했다.

◇ 변화없이 미래없다〓투신사가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공룡과 같이 멸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우리와 비슷한 운용행태를 보였던 일본 투신사의 경우 외국 투신사에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일본의 상위 20개 투신사 중 외국사 비중은 1997년 12.0%에서 올해 18.8%로 비약했다.

굿모닝증권 강창희 고문은 "스미토모은행이 지난해 판매한 투신 상품 20개 중 19개가 피델리티 등 외국 투신사 상품이었고, 하나만이 일본 상품이었다" 며 "일본 은행들도 일본 투신사를 믿지 못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투신사 전직 주식운용담당 임원은 "세종하이테크 주가조작 사례와 같이 펀드 매니저들이 '작전' 에 앞장서는가 하면 약정을 미끼로 증권사로부터 접대와 향응, 심지어 금품을 받는 사례가 아직도 있다" 고 비판했다.

◇ 고객 돈을 귀하게 대접해야〓그동안 정부와 투신사들은 증시부양을 위해 스폿펀드 등을 내세워 상품을 단기화하고 소규모 펀드를 난립시켰다. 또 수익률로 승부하기보다 수탁고 경쟁에 매달렸다.

고객을 끌어들이는 데만 급급해 책임도 지지 못할 수익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고객 손실과 함께 엄청난 부실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공적자금 형태로 국민 부담으로 연결됐다.

펀드 규모가 작고, 1년 안팎의 단기 펀드가 주류이다 보니 한 펀드 매니저가 보통 20개 안팎의 펀드를 관리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20개 펀드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고객 돈에 제대로 신경쓰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제일투신운용 김성태 주식운용팀장은 "국내 투신사들은 펀드 매니저 양성교육은 소홀한 채 단기 실적만 놓고 책임추궁에 바쁘다" 면서 "기다려주지 못하고 실적이 떨어질라치면 교체하기 일쑤여서 펀드 매니저들이 기업 가치에 기초한 장기투자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고 지적했다.

삼성금융연구소 김진영 금융팀장은 "투신사들이 언제까지나 비과세 상품으로 연명할 수 없는 만큼 정부 의존을 스스로 버려야 한다" 며 "투자자들도 투신이 저축기관이 아닌 투자기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고 말했다.

한국투신운용 조영제 사장은 "투신이 고객의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은 고객의 돈을 불려주는 길" 이라고 강조했다.

원금을 까먹는 금융기관을 다시 찾을 고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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