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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위대한 식재료’] 포항초 ‘곡강 시금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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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추운 겨울에 경북 포항으로 먹거리 취재하러 떠난다고 하니 사람들은 대뜸 “과메기?” 하며 묻는다. 혹은 “과메기랑 대게 같이 취재하려는구나” 하고 넘겨짚기도 했다. 그런데 추운 날 멀리멀리 포항까지 가서 취재하려는 것이, 과메기도 대게도 아닌 시금치라고 하면 다들 피식 웃었다. “고작 시금치라니!”가 일반적 반응이었다.

차갑고 세찬 겨울 바닷바람을 늘 맞으며 노지에서 겨울을 나는 포항초 시금치는 키가 크지 못하고 색깔도 검은 녹색이다.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지면 키를 더욱 낮추고 땅에 착 달라붙는다. 시금치 밭에는 제초제를 한 방울도 쓰지 않아 자잘한 잡초들이 그대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고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식재료다. 과메기를 매일 먹고 살 수는 없지만 시금치야말로 계속 식탁에 오르는 기본 반찬 아니던가. 게다가 나처럼 제철 재료가 아니면 먹지 않겠노라 독한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겨울의 시금치가 얼마나 귀한 채소인지 실감할 것이다. 요즘엔 한여름처럼 애호박·풋고추·오이·상추 등이 수퍼마켓에 진열되어 있어도 나는 못 본 체 지나간다. 모두 온실재배를 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저건 내 신념에 맞지 않는 식재료야.” 독립운동이나 하듯 비장한 각오로 꾹 참고 지나가지만, 한겨울에 먹을 신선한 야채가 그리 마땅치 않다. 결국 고르고 골라도 겨울에 제철을 맞는 야채는 물미역이나 파래 같은 해조류와 늦가을에 수확한 통배추와 무, 그리고 시금치뿐이다. 그러니 나에게 겨울 시금치는 가장 귀한 겨울 채소다.

 사실 시금치는 겨울에 가장 맛있다. 이른바 ‘포항초’ ‘섬초’라고 불리는 맛있는 시금치를 먹을 수 있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뿐이다. 섬초는,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서 재배하기 시작해 붙은 이름이다. 주로 남해안 지방에서 나는 시금치이며, 포항초는 포항에서 생산하는 시금치를 가리킨다.

 포항초 중 ‘곡강 시금치’는 유기농 시금치로 유명하다. 포항의 대표적 친환경 생산물이 된 곡강 시금치를 만든 이등질(66·경북친환경농업인연합회 회장)씨를 만나 여러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이등질씨가 시금치 농사에 손을 댄 것은 1989년이었다. 농사는 지역 특성과 맞아떨어지지 못하면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예전부터 유명한 포항 시금치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포항에서 시금치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시대부터였다고 한다. 지금은 포항제철이 들어서 있는 백사장에 시금치 밭이 많았다는 것이다. 포항은 강수량이 매우 적은 곳이다. 특히 겨울에 눈이 거의 오지 않아 노지에서 시금치를 재배하기가 좋다. 겨울 최저기온도 대개 영하 5도 정도에 그친다. 게다가 모래밭은 물 빠짐이 좋아 시금치 재배에 아주 적당한 토양이다.

 몇 년 후 어렵사리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품질 인증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1995년부터 이 기관에서 무농약 재배를 해야만 엽채류 상품의 품질 인증을 유지할 수 있다고 통고를 해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금치의 무농약 재배는 생각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부 방침이라 어쩔 수 없이 품질 인증을 유지하기 위해 결국 무농약 재배를 결심했다. 힘들지만 올바른 길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3년 동안은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 병충해가 심해 시금치 이파리가 망사처럼 되었고 하나도 출하할 수 없었다. 경상도식 표현으로 ‘완전히 조진’ 것이다. 그 과정을 거치며 시금치 작목반을 함께하던 동료들 몇몇이 재배를 포기했다.

쩍 벌어져 너펄거렸던 시금치가 금세 단정하게 단으로 묶인다. 역시 베테랑 농사꾼의 손은 날렵하다.

 나로서는 그 대목이 가장 궁금했다. 한겨울에 키우는 시금치인데, 무슨 병충해가 그리 심할까 하는 의문 말이다. 포항초는 9월에 파종하는데, 날이 추워지기 이전인 10월 하순까지 병충해가 극성이란다. 그 시기만 지나면 포항은 급격히 기온이 떨어져 병충해 피해가 크게 줄어든다. 그러니 그 시기에는 어쩔 수 없이 농약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온갖 실험을 거쳐 유기농 시금치라 부를 수 있는 포항초를 재생산할 때까지 3년이 참으로 힘들었다.

 이 회장이 보여준 시금치 밭은 곡강이 아니라 ‘대보’라는 지역의 밭이었다. 곡강에 있는 밭은 1월 내내 열심히 솎아 팔아서 ‘사진발’이 잘 안 나올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올해 전국적으로 시금치가 흉년이라 값도 예년의 2~3배가 되었지만, 무엇보다 물량이 모자라 곡강 밭의 것은 거의 다 팔렸다고 한다. 지난 가을에 비가 많이 오는 바람에 잔뿌리가 손상되어 죽은 시금치가 많았다. 포항에서는 결국 10월 중순에 다시 파종을 해서 키웠고, 비교적 좋은 값으로 단기간에 팔렸다.

 대보의 시금치 밭은 삼면이 바다였다. 삼면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엄청났다. 한반도 동남쪽 마치 토끼꼬리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온 호미곶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의 시금치 브랜드는 ‘호미곶해풍시금치’(대표 김기홍·53)였다.

 겨울의 바닷바람은 차갑고 거셌다. 파도는 모든 걸 삼켜버릴 듯했고, 주변의 어선들도 항구에 묶여 있었다. 그 찬바람을 맞고 그저 잠깐 서 있기만도 힘들었다. 그런데 발밑의 시금치들은 시커멓게 색깔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푸른빛이 남아있는 채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었다. 대신 추운 바람을 맞으며 버티느라, 모두들 땅바닥에 바짝 붙어있다. 낮은 포복을 하듯 모든 이파리를 옆으로 쫙 벌리고 납작 엎드린 형국이었다.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면 시금치들은 이파리를 쳐들지만, 추운 날에는 이렇게 착 달라붙어 있단다. 이렇게라도 살아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장하다 싶었다. 생명에 대한 경외(敬畏)란 이런 때 쓰는 말이다.

호미곶은 삼면이 바다이고, 바닷가 허허벌판 모래밭에 시금치를 키운다. 달고 진한 맛의 포항초를 키우는 것은 이 바닷바람이다. 세찬 파도를 몰고 바람이 불어오는데, 아주머니는 두 손 모두 놓은 채 광주리를 이고 걸어간다. 달인이 따로 없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버텨내며 노지에서 생존하는 시금치이니, 얼마나 탱탱하고 강인하겠는가. 이 회장은 겨울 시금치의 맛은 바로 여기에서 결정이 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키우는 시금치는 대개 두 가지 종자로 나뉜다. 봄에 파종해 여름에 먹는 종자는 서양계 종이다. 병충해가 적고 더운 기후에 잘 크는데 대신 맛이 싱겁다. 여름에 먹는 시금치들은 다 이 종류다. 이와 달리 가을에 파종해 겨울에 수확하는 포항초·섬초들은 모두 동양계 종 시금치다. 이파리가 두껍고 맛과 향이 진하고 달착지근한데, 병충해도 많단다. 그러니 겨울 시금치는 종자부터 여름 시금치보다 달고 맛이 있다. 하지만 포항초나 섬초라고 해도 비닐하우스 안에서 키우거나 비교적 바닷바람이 덜 부는 곳에서 키운 것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노지의 것보다는 맛이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밭의 것이라도 해안 가까이에서 바닷바람 많이 쐰 것들일수록 더 달다고 한다. 식물의 맛과 향이란 결국 자연 속에서 벌레와 추위, 바람 같은 악조건 속에서 버텨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강인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밭에서 수확한 시금치는 실내 작업장 안에서 단으로 묶는 작업을 한다. 추운 날에는 아주머니들이 서둘러 일을 접고 실내 작업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기껏해야 10~15㎝ 가량의 키 작은 시금치들이 수북수북 쌓여 있고, 아주머니들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시금치를 다듬고 있었다.

 실내에 들어와 자세히 살펴보니 확실히 노지 시금치의 모양은 달랐다. 흙먼지가 많이 묻어 있고, 이파리 색깔은 아주 검푸른 빛을 띠었다. 이걸 보니 수퍼마켓에서 겨우내 내가 사 먹었던 섬초와 포항초가 비닐하우스의 것임을 확실히 알겠다.

 다듬기의 마지막 단계를 이 회장과 김기홍 대표가 시범 삼아 보여주었다. 익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시금치를 줍더니만 순식간에 가지런한 단으로 묶어 내놓는다. 사무실에서 넥타이 매고 앉아 시종 차분하고 정돈된 말투로 설명을 해줄 때의 이 회장은 마치 행정관료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렇게 시금치 단 묶는 것을 보니 최고 베테랑 프로페셔널 농사꾼이 분명했다. 이렇게 묶은 시금치 한 단은, 올해 도매 출하 가격이 2000~3000원 수준이란다. 30단 한 상자는 무려 9만원이다.

 집에 돌아와서 서둘러 시금치를 데쳤다. 노지 것이라 줄기가 질기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웬걸 뜨거운 물이 들어가자마자 바로 무를 정도로 아주 연했다. 데친 시금치를 찬물로 헹구어 살짝 짠 후 간장과 깨소금, 참기름과 다진 파를 넣고 무쳤다. 시금치무침은 간장으로 하는 것이 맛있다. 나는 워낙 감칠맛을 좋아해 공장제 간장만 넣는 것을 선호하는데, 이 유기농 시금치는 워낙 맛이 달아서 공장제 간장과 집에서 담근 조선간장을 조금씩 섞었다.

 시금치 특유의 단맛이 짭조름한 간장과 고소한 참기름과 착 어우러진다. 아, 이 맛에는 밥이 있어야 돼! 서둘러 밥을 펐다. 

글=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 1961년 서울 신설동 한옥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 개성 출신 할머니와 전북 출신 어머니의 손에서 나온 음식을 먹으며 ‘절대 미각’이 개발됐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대중문화평론가로, 음식에 대한 ‘평론’은 중간중간 취미 생활로 이어가고 있다. 『한국대중가요사』 『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등이 그의 직업 관련 저서. 또 2006년 음식에세이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를 펴냈으며, 2010년 3월부터 1년 동안 중앙SUNDAY에 칼럼 ‘제철 밥상 차리기’를 연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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