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나는 꼼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오래전, ‘○○사진 연구회’ 모임일 거다. 작품전을 위해 모인 자리. 보통 때는 점심에 만나 헤어졌었는데 그날은 저녁식사와 함께 술까지 곁들이게 됐다. 회원들은 나를 포함해 여자 3명, 남자 7명. 나름 예술 한답시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술이 들어가자 누군가가 분위기를 풀겠다고 농담을 시작했다.

 큰 가슴에 끼어 죽은 남자 이야기, 쌍코피 얘기까지. 모두 여성의 성을 소재로 한 것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얘기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 성욕 배설 얘기까지 할 땐 다리가 오그라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급한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다 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분위기 띄울 때면 늘, 누구나, 그렇게 해 왔듯이 그저 ‘웃자고 한 얘기’일 터인데 난 ‘죽자고 덤벼들고’ 싶었다. 남자들은 그런 유머가 꽤 세련된 줄 아는가 보다.

 며칠 전 비슷한 일이 터졌다. 대중적 인기몰이를 통해 거대한 권력으로 급부상한 인터넷방송 ‘나꼼수(나는꼼수다)’. 여러 제도적·법적 장치 등의 이유로 기존 언론에서는 다루지 못하는 예민한 이슈들을 짚어 주고 야단치고 긁어 주고 하는 탓에, 정치에 관심이 없던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면서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

 ‘나꼼수’ 비키니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한 여성 지지자가 비키니 차림으로, 구속된 정봉주 전 의원의 석방을 요구했다. 비키니를 입고 시위를 하건 란제리를 입고 하건 그거야 표현의 자유로 넘길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비키니 시위보다 ‘나꼼수’ 멤버들의 저질스러운 발언이다. 모 멤버는 “정 전 의원께서는 독수공방을 이기지 못하시고 부끄럽게도 성욕 감퇴제를 복용하고 계신다. 마음 놓고 수영복 사진을 보내시기 바란다”며 청취자들에게 수영복 시위를 부추겼다. 다른 멤버는 “가슴 응원 사진 대박이다. 코피를 조심하라”고 했다.

 수영복 사진을 보고 감퇴된 성욕을 복구하겠다는 말인지, 대박 가슴 사진을 보고 뭘 하기에 코피를 흘린다는 말인지. 이들이 지껄여댄 저질 발언들에 대해 말들이 많아지자 멤버 대표는 성희롱할 생각도 없었고 성희롱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단다. 의도가 없건 있건 간에 듣는 사람이 심한 성적 모욕감을 느꼈다면 그건 명백한 성희롱이다.

 “생물학적 완성도가 높은 여체에 감탄한다”는 멤버 대표의 말 또한 불쾌하기 짝이 없다. ‘생물학적 완성도가 높은 여체’들을 줄줄이 세워 놓고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여체를 뽑는 ‘미인대회’를 10여 년 전에 지상파 방송에서 몰아내는 데 무척이나 애를 썼던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가 ‘미스코리아 대회’를 다시 지상파 방송으로 복귀시킬까 겁도 난다. 감탄하고 싶은, 완성도 높은 여체들이 한 명도 아니고 줄줄이 무리 지어 나오는 그 대회를 그가 골방에서 시시덕거리며 보길 그리워하는 것 같아서다.

 인터넷에는 비판의 목소리와 함께 변호하는 글도 많다. 스스로 규정한 ‘나꼼수’의 정체성이 청취자들이 골방에서 시시덕거리며 듣는 해적방송이란다. 방송 특성상 자극적이고 극단적일 수밖에 없으니 지상파 수준의 도덕성과 성(性)의식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며 변호하고 있다.

 중요한 시국, 큰일 하는 마당에 작은 일로 확대 해석해서 분열을 일으켜 발목 잡지 말라고도 하더라. 이 말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진보가 끊임없이 비판해 온 기성세대들이 흔히 쓰던 말이다. 섹슈얼리티 이슈는 결코 작은 일도, 사소한 일도 아니다. 어떤 진보적인 것보다 우선시돼야 할 중요한 가치다.

 성역까지 침범해 들춰내는 ‘나꼼수’의 그 용감함은 칭찬하고 싶지만 순간적으로 유포되는 파급력을 가진 거대한 권력이 된 이상, 이제는 책임감도 느끼고 여성들의 분노가 뭔지, 뭐가 문제인지 깊이 생각 좀 해 봐라.

 그렇게 욕을 먹고도 아직까지 사과는커녕, “에로틱 코드, 유치한 성적 농담 하지 않고 방송하기로 약속 드릴 것 같으냐? 계속 유치한 성적 농담을 하겠다”고 오히려 한술 더 뜨고 있다. 같은 인간인, 여자에 대한 예의가 아주 ‘꽝’이다. 여성의 지지 없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함을 기억하라. 여성의 몸이나 성을 소재로 지껄여대는 농담. 여성을 남성 욕망을 배출하는 도구로 성적 대상화하는 유머.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다.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