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밸리 코스닥 외줄타기 이제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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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증권정보 제공업체인 n인베스트는 오는 5일까지 회사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자금을 대온 미래에셋측이 "확실한 수익모델도 없고 다른 경쟁 사이트와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며 추가 펀딩에 난색을 표시한 때문이다. 직원들은 이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느라 사무실에 거의 출근하지 않는다.

제3시장의 콘텐츠 업체인 A사는 벤처 캐피털들로부터 90배까지의 프리미엄을 얹어 68억원을 유치한 유망벤처. 그러나 회사 대표가 주식 20억원어치를 몰래 매각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직원들이 "주가하락으로 스톡옵션 행사가 힘들다" 며 반발했고 사장은 구조조정을 이유로 30명을 쫓아냈다.

거리로 내몰린 직원들은 "사장의 학력.경력이 위조됐다. 주가조작을 위해 가짜 보도자료를 돌리는 등 헛소문을 유포시켰다" 고 주장하고 있다.

닷컴 위기론과 코스닥 폭락 이후 테헤란 밸리가 외우내환에 몸살을 앓고 있다.

알짜마트나 분당 신도시의 최대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업체인 네티존의 몰락은 빙산의 일각일 뿐 한계에 몰린 이름없는 벤처들이 줄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서울 등 8대 도시의 정보통신업종 신설 법인은 3천5백39개(7월 대비 10.3% 감소) 로 올들어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면 부도업체는 7월과 비슷한 수준인 2백24개로 나타났다.

한은 관계자는 "코스닥 침체와 닷컴기업 거품론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며 시간이 흐를수록 파장이 커질 것으로 우려했다.

이에 따라 테헤란 밸리에도 "올초 사무용 가구업체들이 떼돈을 벌었다면 연말에는 (도산한 벤처들이 내놓는 컴퓨터와 사무용 가구들로) 고물장수가 한몫 잡을 것" 이란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벤처 인큐베이팅업체인 이네이블의 김웅겸 대표는 현재 상황에 대해 "벤처 옥석 가리기가 아니라 패러다임 자체가 무너진 구도" 라고 지적했다.

벤처 캐피털 투자→코스닥 등록→주가 폭등→자금회수로 이어지던 벤처붐이 주가폭락→프리 코스닥 냉각→벤처 자금난의 악순환에 빠졌다는 것이다.

김대표는 "코스닥 등록만 노리는 외줄타기에서 벗어나 벤처와 벤처캐피털 업계가 힘을 합쳐 흡수합병.배당 등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할 시기" 라고 말했다.

테헤란 밸리가 최근 신경을 곤두세우는 대목은 이른바 ''살생부'' 다.

KTB네트워크.E미래에셋벤처캐피털 등 대형 창업투자사들이 벤처들을 A.B.C 등급으로 분류해 가망성 없는 투자기업들을 정리하는 가지치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리스트에는 일부 코스닥 등록기업들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벤처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멀쩡하게 보이는 벤처들도 속으로 멍이 들고 있다.

지난해 말 테헤란 밸리에 들어온 인터넷 쇼핑몰 업체는 높은 임대료를 피해 사무실을 강북으로 옮기려다 이를 백지화시켰다.

"인테리어에 들어간 2억원을 10개월 만에 포기하자니 아깝고, 사무실을 옮길 경우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소문이 퍼져 살생부에 오르는 것이 두렵다."

회사 관계자는 "남은 자금으로 3~4개월 버티기도 힘들다" 며 "꼼짝없이 늪에 빠져드는 기분" 이라고 말했다.

코스닥 호황을 틈타 여유자금을 쌓아놓은 벤처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상반기에 발행한 전환사채(CB) 의 만기가 돌아오면서 현금 유동성 확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주가가 전환가격을 크게 밑돌자 현금으로 CB를 되사달라는 CB매입자들의 풋옵션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우영과 썬트로닉스는 아예 해외에서 발행했던 CB를 매입해 소각하기도 했다.

요즘 한글과컴퓨터의 신경은 코스닥 시세판에 온통 쏠려 있다. 인터넷 채팅 업체인 하늘사랑과의 합병이 주가하락으로 불투명해진 것. 한컴은 주가 1만3천10원에서 하늘사랑과의 합병을 발표한 뒤 큰 폭의 주가상승을 기대했지만 주가는 현재 9천4백80원으로 떨어졌다.

한컴측은 "이대로 주총까지 가면 대부분의 주주가 주식매수 청구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여 현금부담이 엄청나다" 고 우려했다.

이에 따라 한컴은 당초 10월12일로 예정한 주주총회를 일주일 늦추면서까지 주가 끌어올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외부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내분에 휩싸인 벤처들도 늘고 있다. 기술력이 뛰어나다는 B사는 지난 한달간 기술을 개발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외국기업이 액면가 대비 10배의 프리미엄에 인수를 제의하자 주주와 사원들이 정면 충돌했다.

회사의 대주주는 "적당한 가격이니 빨리 매각하자" 고 압박하지만 20배의 프리미엄을 내고 들어온 2개의 창투사가 "손해보고 팔 수는 없다" 며 제동을 걸었다.

사원들도 "전망이 밝은데 대주주 마음대로 처분하면 안된다. 외국기업에 넘어가면 코스닥 등록도 힘들다" 며 반대입장을 밝혀 매각을 어렵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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