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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된 독일 명과 암] 4. 유럽의 견인차 된 독일

중앙일보

입력

통일과 함께 독일은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유보됐던 주권을 완전 회복했다. 그뒤 독일은 국제무대에서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제바스티안 하르니쉬 독일 트리어대 교수는 "독일은 정치.경제적 능력에 걸맞은 위상 설정이 필요하고 주변국들도 이에 찬성하고 있다" 고 말했다.

그간 나치 잔재를 완전 청산하고 민주국가로 다시 태어난 독일에 주변국들이 신뢰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냉전체제 붕괴 후 세계 경찰 역할을 해온 미국이 방위비 등을 이유로 독일에 국력에 걸맞은 역할 분담을 요구하기 시작해 안팎 환경이 맞아 떨어지고 있다. 이같은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1994년 독일군은 파리 중심가인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했다.

비록 독.프랑스 양국을 주축으로 창설한 유로군단 소속 독일군이긴 하지만 프랑스혁명 기념 퍼레이드에 독일군이 참가한 것은 독일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사라지고 위상도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독일의 지위 상승은 전투부대 해외파병에서도 나타난다. 지난해 3월엔 54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 공군 전폭기가 유고 공습에 참가, 베오그라드 인근을 폭격했다. 물론 이전에도 독일군의 해외파병은 있었다.

91년 걸프전 때 독일은 전비만 부담했고, 95년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군 일원으로 보스니아에 전투병력을 파견했다.

이에 앞서 독일 헌법재판소는 "독일군은 유엔 평화유지군 틀 안에서 해외에 파병할 수 있다" 고 결정, 그간 나토 역내에서만 방위활동을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돼 온 독일군 해외파병에 법적 걸림돌을 제거했다.

지난 5월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에 독일 재무차관 출신인 호르스트 쾰러가 선출됐다. 당초 카이오 코흐 베저 차관을 추천했다가 미국측 반대로 좌절된 독일은 외교역량을 총동원, 결국 쾰러를 당선시켰다.

국제적으로 목소리가 커지면서 독일은 이제 경제력을 바탕으로 명실공히 유럽의 중심국가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난 9월 요슈카 피셔 독일 외무장관은 베를린에서 열린 확대 공관장회의에서 "독일의 국제적 비중은 독일인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다" 고 말했다. 따라서 21세기 새로운 위상에 걸맞은 외교정책이 추진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

독일 외교의 첫번째 목표는 유럽 통합이다. 프랑스와 함께 유럽통합의 중심 세력인 독일은 구체적으로 '통합의 심화' 와 '유럽연합(EU) 확대' 를 노린다.

'통합의 심화' 란 강력한 유럽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피셔 외무장관은 지난 5월 공동의 헌법,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골자로 하는 유럽연방 창설을 공식 제안했다. 프랑스 등 유럽 몇몇 나라 만이라도 먼저 정치적 단일체를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또 하나의 목표인 '유럽 확대' 는 동유럽 국가들의 EU 가입을 말한다. 현재 동유럽 국가들은 조속한 가입을 원하고 기존 회원국은 시간을 끄는 형국이지만 2005년엔 폴란드.헝가리.체코가 EU에 가입할 전망이다.

독일은 유럽 통합과 확대를 강조하면서 "초강대국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극(單極)구조를 청산, 유럽이 미국의 파트너 겸 경쟁자로 자리잡아야 한다" 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유럽은 경제적으론 강하지만 정치적으로 약해 지난해 유고 공습 때처럼 유럽 자신의 문제조차 미국이 없으면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독일이 대미 관계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여전히 독일 외교의 첫번째 고려 대상국이다.

그런데 독일은 최근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 구축 구상에 명백히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등 과거와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통독 이후 지정학적으로 무시할 수 없게 된 러시아에 대한 배려다.

독일이 군사.외교적으로 미국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아마도 유럽 통합 속도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

독일이 유럽 통합 추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그 속도를 앞당겨 미국 영향력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표시인 것이다. [베를린=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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