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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그리스 위기는 내부 정쟁으로 풀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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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그리스 재정 위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당초 아시아 외환위기와는 다른 처방을 기대한 것은 착시(錯視)에 불과했다. 과다 채무로 촉발된 위기는 편법으로 풀 수 없다. 드디어 유럽연합(EU)과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리스에 15일까지 승인하라며 강력한 재정 긴축안을 압박하고 있다. 최저임금 22% 삭감, 공무원 1만5000명 감축 등이 담긴 내용이다. 4월 총선에서 어느 당이 집권해도 합의안을 어기지 않겠다는 정치권 전체의 합의도 요구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IMF가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이회창 대선후보의 공동 약속을 받아냈던 것과 닮은꼴이다.

 그리스 국민은 가혹한 긴축안에 항의하고 있다. 노조는 48시간 총파업에 들어갔고, 경찰 노조는 시위진압에 손을 놓았다. 정치권도 분열했다. 연립 내각의 일부 각료들이 사임했으며, 엄청난 정치적 진통이 4월 총선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재정개혁을 놓고 그리스와 EU가 싸웠다면, 이제는 그리스 내부 전쟁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리스 야당들은 “독일이 우리 존엄성을 짓밟고 있다”고 선동하고 있다. 하지만 1300억 유로의 2차 구제금융을 못 받으면 다음달 만기인 145억 유로를 갚을 도리가 없다. 그리스의 디폴트는 불가피하다. 유로존 탈퇴 역시 떼쓰기 카드나 다름없다. 그나마 그리스가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ECB에 접근할 수 있는 유로존이었기에 가능했다.

 국가 디폴트는 재앙이다. 국민은 예금을 잃게 되고, 연금도 끊어진다. 모든 것을 잃지 않으려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스는 총선 이후에도 흔들림 없는 긴축재정을 이행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하지 않은 구제금융은 없었다. 그리스엔 어려운 결정의 시기지만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그동안 인내해 온 다른 EU회원국도 서서히 피로감을 드러내지 않는가.

 EU 역시 과감한 그리스 구제에 나설 필요가 있다. 이번 합의로 EU는 사실상 그리스를 유럽 재정위기의 방화선(防火線)으로 삼았다. 신속하고 전방위적인 지원만이 금융시장 불안심리를 잠재울 수 있다. 만약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지거나 유로존에서 탈퇴하면 상상할 수 없는 후폭풍을 부를지 모른다. 포르투갈·스페인·이탈리아로 재정위기가 전염되고, 유럽 금융시스템이 무질서한 혼란을 맞을 수 있다.

 예전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미국·EU·중국이 탄탄하게 버텨줘 신속한 탈출이 가능했다. 반면 유럽은 더 이상 기댈 언덕이 없다. 미국·일본은 저성장에서 헤매고, 중국의 고도성장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리스가 디폴트에 빠지면 한국 역시 글로벌 충격을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가 내부 갈등을 하루빨리 종식하고, 국제사회가 과감한 지원에 나서도록 한국도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한 총선을 앞두고 복지공약을 남발하는 여야는 그리스의 서글픈 시위 현장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히 ‘굴복하지 않겠다’는 플래카드를 든 경찰 노조 소속의 정복 차림 경찰들이, 시위진압에 나선 동료 경찰들과 대치하는 기막힌 사진을 똑똑히 들여다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