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익 ‘다윈의 정원’] ‘말의 각축장’ 될 한 해, 정신 똑바로 차립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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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 아이디어는 어떻게 진화하는가

 어느 유명 광고회사의 회의실 풍경. “제가 어제 시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어요. 한번 들어보실래요?” 동료 카피라이터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듣는다. 하지만 잠시 후 누군가가 “좋긴 한데요, 그분이 오실 만한 문장은 아닌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한 건설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광고 기획회의에서 오가던 말들이었다. 여기서 ‘그분’이란 ‘카피의 신’일 것이다.

 이런 회의실이 내 실험실이 된 적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광고 카피들이 실제로 어떻게 탄생하고 진화하며 확산되는지를 과학적으로 이해해보고 싶던 차, 박웅현 카피라이터가 자신의 회의실로 이방인을 기꺼이 초대해줬다. “진심이 짓는다”나 “생각이 에너지다”와 같은 명품 카피를 만들 수 있었던 팀은 실제로 어떻게 단어를 퍼 올리고 문장을 제작하며 의미를 창조할까?

 마치 아마존의 한 오지에 짐을 푼 인류학자처럼, 나는 거기서 생산되고 교환되는 온갖 신호들을 포착하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 당시의 내 관찰 노트에는 누가 어디에 앉고, 어떤 이야기를 하며, 또 누가 그것을 이어받고 어떻게 정리되는가에 대한 관찰 기록이 빽빽하게 쓰여 있다. 당시 나는 누군가가 의견을 제시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표정과 제스처로 화답하는지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회의실에서의 아이디어 진화는 이런 참여 관찰과 같은 인류학적 방법을 통해 객관적으로 관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했다. 대체 어떤 유형의 아이디어가 살아남는가?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가 결국 사라지는 아이디어는 왜 그런 운명에 처했을까? 여기서도 혹시 계급장과 짬밥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윽박지르지는 않을까?

말을 하고, 그 말에 헌신하는 사람들

 관찰 결과를 살짝 공개해보련다. 우선 회의는 늘 진지했다. 잡담이나 농담 따먹기, 그리고 삼천포 빠지기는 전혀 없었다. 구성원 모두가 문제의식을 공유한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몰입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처음에 화두를 던진 이는 대체로 팀장이었지만 전반적으로 그가 회의를 ‘끌고 간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직급, 성별, 나이 요소 때문에 아이디어의 분출과 확산이 방해받거나 막히지는 않았다.

 가령, 가장 어린 여성 신입사원이 낸 아이디어나 20년 경력의 베테랑 남성 카피라이터의 아이디어나 시세는 동일해 보였다. 중요한 것은 카피의 공감도이지 출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그런데 그 아이디어는 애초에 누구 것이었죠?”라고 묻는다면, 조금 머쓱해질 것 같았다. 모두가 힘을 합해 진화시킨 단어에 대해 촌스럽게 출처를 묻다니 말이다. 이리하여 인류학자가 본 회의장 풍경은 한마디로, ‘아이디어는 평등하다’였다.

 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 보자. 그동안 이 칼럼에서 줄곧 채택했던 방식(‘외계인의 시선’)으로 우리네 회의실의 풍경을 관찰해보면 어떨까? 사실 인간은 참 희한한 동물이다. 자기가 만든 말들(표어·비전·광고·이념 등)에 감동하고 변화되며,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까지 한다.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던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과 유일신에 대한 믿음을 위해 순교의 고통을 참았던 전도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말들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내가 아는 한 지구상의 어떤 생명체도 이런 ‘이상한’ 짓은 하지 않는다. 개나 소가 자신의 꿈을 좇아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구의 역사에서 오직 인간만이 유전적 적응도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뇌를 감염시키는 새로운 문구의 경쟁

 단어가 가지는 이 엄청난 힘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왜 철학자 하이데거가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는 개념으로, 진화생물학자 도킨스가 그것을 ‘밈(meme)’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려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구를 만드는 것은 우리지만 그 문구는 다시 우리를 지배한다.

 이 관점에서 회의실의 풍경을 복기하면 전체 그림은 완전히 달라진다. 회의실은 누구의 아이디어인가에 관한 경쟁이라기보다는 아이디어가 누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가에 관한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 회의는 매력적인 밈들 간의 전쟁터이며 그 밈들은 회의 참석자들의 뇌를 유혹하기 위해 별짓을 다 한다. 그러니 단어들의 유혹에 견디기 위해서라도 회의장에 들어가는 머리는 맑아야 한다.

 최근에 한나라당이 쇄신을 하겠다며 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하고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했다. 민주통합당을 비롯한 여러 정치 조직들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이름’의 가치와 정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또한 ‘쫄지마’ 광풍을 몰고 온 나꼼수 팀도 건재하다. 물론 이 새로운 문구들을 만든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런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그 문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새로운 단어들은 우리의 뇌를 감염시켜 우리로 하여금 그 문구를 더 널리 퍼뜨리게 한다. 마치 내가 개그콘서트의 ‘안 돼’라는 유행어를 퍼뜨리는 중간 고리 역할을 하듯이 말이다. ‘단어의 각축장’이 될 올 한 해, 나쁜 밈에 감염되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이다.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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