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해수찜, 횡성 숯가마 차례로 가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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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횡성. 참숯을 꺼내는 작업은 오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찜질을 시작하는 오전 9시 가마가 알맞게 식어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사진=신동연 선임기자]

싸락눈 흩날리던 지난달 중순. 새벽같이 전남 함평에 내려갔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다섯 시간쯤 달렸을까, 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겼다. 잿빛 개펄을 향해 허름한 해수찜 집이 기운차게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처마 밑에 켜켜이 낀 그을음이 반가웠다. 저곳이 장작불로 유황돌을 달구는 터로구나. 시뻘게진 유황돌로 바닷물을 팔팔 끓여 증기도 쐬고 물찜질도 하겠구나.

 함평 해수찜 전통이 100년도 더 되었다거나, 그 유래가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한증욕(汗蒸浴)이라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등골까지 시린 한겨울에 새벽길을 달려온 우리에겐 쩔쩔 끓는 아랫목의 환상을 채워줄 무언가가 간절했다. 기왕이면 그게 세파에 굳은 어깨까지 부드럽게 풀어주길 바랐다.

참숯장인들의 별미 ‘3초 삼겹살’.

 관광버스 두 대가 잇따라 앞마당에 들어섰다. 전남 나주 남평읍에서 할머니 스물아홉 명과 함께 온 청일점 할아버지는 “여기 해수찜이 좋다기에 따라 나섰다”며 수줍게 얼버무렸다. 전남 담양 부녀회도 단체로 해수찜을 하러 왔다. 희뿌연 증기가 해수탕을 채울 즈음 주부들은 수학여행 온 여고생처럼 반질반질해진 볼을 붉히며 정담을 나누었다.

 좁은 욕탕 하나를 독차지하고 앉았다. 탕에 반쯤 잠긴 솔가지가 푸른 향을 내뿜고 있었다. 약효도 있겠지만 일단 마음이 차분해져서 좋았다. 따뜻한 해수탕에 태아처럼 웅크려 앉았다. 옆 욕탕에서 남평 할머니들의 민요합창이 들려왔다. 유쾌하고 흥겨웠다. 뻐근했던 어깻죽지가 스르르 풀어지는 것만 같았다.

 강원도 땅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횡성 숯가마 찜질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4시. 밤새 숯을 꺼낸 가마는 아직도 머릿수건을 하지 않으면 귀가 화끈거릴 만큼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입구에 들이치는 빛에 의지해 어두컴컴한 가마 속을 파고들었다. 양말의 필요성이 단박에 이해됐다. 노송으로 만든 깔개 위에 두꺼운 방석을 덧대지 않으면 뜨거워서 5분 이상 엉덩이를 붙이고 있기가 힘들었다.

 암흑에 묻혀 있으니 낯선 사람과도 거리낌없이 대화 꽃이 피었다. 아픈 노모와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한 주부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이면 온다며 웃었다. 누구보다 진지하게 가마 속을 지키던 초등학생 여자아이는 만화 『식객』에서 숯가마를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온몸에 김이 날 때까지 찜질을 하던 초로의 신사는 대학교수였다. 학생들과 함께 합숙을 와서 장작도 패고 막걸리도 빚다가 아흐레째 되는 날 처음 숯가마 찜질을 한다고 했다.

 낯선 이들과 한 가마에서 두런두런 나누던 수다가 익숙해질 무렵 자리를 나섰다. 훈훈한 참숯향이 밴 몸에 차고 맑은 공기가 엄습했다. 하지만 감기 따위는 걱정도 되지 않았다. 찜질로 뜨끈하게 충전된 이 몸, 이 마음이 올 한 해도 거뜬히 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글=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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