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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바둑이야기-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전 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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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1989년 제1회 응씨배 결승전은 한·중 양국의 관심이 집중된 대승부였다. 특히 중국은 녜웨이핑의 실력이 천하제일이어서 바둑 종주국의 자부심을 크게 떨칠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녜웨이핑의 인기 또한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기대와 인기가 결정적인 순간에 녜웨이핑의 패착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으니 승부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다. 기적적으로 역전승한 조훈현은 이후에도 세계적 강자로 오래 살아 남은 반면 패자 녜웨이핑은 승부 무대에서 영영 사라졌다.

8집 덤에 옥죄던 조훈현 앞에 희망의 빛이 …

1회 응씨배의 승자 조훈현 9단은 50세까지 세계대회서 11번 우승하며 불세출의 제자 이창호 9단과 더불어 한국바둑의 세계제패를 완벽하게 일궈낸다. 시상대에선 조 9단과 주최자인 잉창치 씨. [한국기원 제공]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조훈현은 그 봄과 여름 날, 녜웨이핑의 바둑을 보고 또 봤다. 그의 행마가 지닌 질식할 듯한 ‘두터움’의 잔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해결책은 특별히 떠오르지 않았다. 1989년 9월 2일 오전 10시, 싱가포르 웨스틴 스탠퍼드호텔에 마련된 특별대국장에서 결승 4국이 시작됐다. 3국까지 1대2로 밀린 조훈현 9단에겐 이 판이 막판이었다. 흑을 쥔 그는 포진에서 자신의 장기인 ‘스피드’ 대신 두터움을 선택했다. 백을 쥔 녜웨이핑 9단은 자연 ‘실리’로 돌아 불과 50수 만에 네 귀를 모두 차지하게 됐다. 조훈현은 허허벌판인 중앙을 에워쌌다. 생전 처음 보는 조훈현의 ‘우주류’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백의 실리를 따라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8집의 큰 덤(한국식으로는 7집 반)이 끈덕지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덤이 문제야”라고 검토하던 우칭위안(吳淸源) 9단은 말했다. 그 한마디가 사형선고처럼 무겁게 울려퍼졌다. 중반을 지나 종반으로 갈수록 윤곽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악몽 같은 덤이 조훈현의 앞을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한데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이한 사건이 발생했다. 조훈현이 옥쇄를 각오하고 눈감고 승부수를 던질 때에도 얼음처럼 냉정하게 받아주던 녜웨이핑이 이상한 자리에서 돌연 손을 빼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그 바람에 우두둑 백 두 점이 떨어져 나갔다. 승부란 참으로 오묘하고도 오묘한 것. 인간 심리의 저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냥 받아주면 이긴 바둑인데 녜웨이핑은 왜 손을 빼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일까. 조금 전엔 100% 성공이 보장된 변화마저 피하던 녜웨이핑이 왜 이처럼 불확실한 곳에서 변화를 자청한 것일까.

이긴 바둑을 순탄하게 마무리하는 과정은 ‘사과 따기’와 같다. 눈앞에 있는 사과를 무심히 손을 뻗어 따면 된다. 곁에서 볼 때는 얼마나 쉬운가. 하나 판 앞에 앉으면 손을 뻗는 일이 쉽지 않다. 어느 순간 ‘의심’이 싹튼다. “정말 이겼나?” 이 의심 한 조각이 암귀처럼 속삭인다. “손을 뻗으면 위험하다.”

녜웨이핑-조훈현 승부 인생 가른 ‘운명의 1집’

1989년 9월 6일자 중앙일보. 1면에 조훈현 승리를 보도했다.

녜웨이핑은 당대 최강의 승부사였음에도 그는 감히 손을 뻗어 사과를 따지 못했다. 대신 아주 복잡한 변화의 길로 들어섰다. 보장된 승리는 날아가고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절망 속에서 빛을 본 조훈현은 신들린 듯 호착을 연발하며 국면을 박빙의 승부로 몰고 갔다. 무려 318수에 이르는 대 접전 끝에 조훈현의 ‘1집 승’이 확정됐다(한국 계산으로는 반집이다). 이로써 4국까지 승부는 2대2. 조훈현 9단은 천신만고 끝에 승부를 최종국으로 몰고 갔다.

역전패는 아프다. 반집 패는 더 아프다. 더구나 반집은 불운의 상징이기에 더욱 떨치기 어렵다. 녜웨이핑 9단은 깊은 자책과 함께 승리를 도둑맞은 듯한 혼란에 빠졌다.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을 포함해 자신의 승리를 굳게 믿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그럴수록 4국에서 저지른 자신의 바보 짓(?)이 뜨거운 불길이 되어 가슴을 치밀었다. 이틀을 쉬었다. 그리고 내일의 대국을 앞두고 잠 못 이루는 긴 밤이 찾아왔다.

이튿날(9월 5일) 아침, 대국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조훈현 9단의 두 눈은 밤새워 운 사람처럼 퉁퉁 부어 있었다. 깜짝 놀라 녜웨이핑 9단을 보니 이게 웬 일인가. 그의 얼굴은 너무 창백해 핏빛이 하나도 없는 납인형과 같았다. 어린 시절에 봤던 영화에 나오는 시체의 얼굴에 납을 부어 만든 납인형… 그는 견딜 수 없는 압박감에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5국의 승부가 이때 가려졌다고 믿는다.

조훈현 ‘잔잔한 떨림’ vs 녜웨이핑 ‘힘겨운 압박감’

응씨배의 패자 녜웨이핑은 재기하지 못하고 승부 무대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다.

최종국에서 빈 바둑판을 마주한 조훈현은 잔잔한 ‘떨림’에 젖어든다. 첫사랑 같은 기분 좋은 떨림 속에서 조훈현은 바람처럼 바른 속도로 판 위를 내달린다. 4국과 달리 ‘빠른 창’이라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승부는 아주 허망하게 결정 났다. 우상의 접전에서 녜웨이핑이 믿을 수 없는 착각을 범해 불과 145수 만에 승부가 끝난 것이다. 마지막에 착각을 깨닫고 입을 크게 벌린 녜웨이핑의 모습이 모니터에 크게 비쳤다. 그 장면을 본 녜웨이핑의 부인 쿵상밍 8단이 얼굴을 감싸 쥐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조훈현 9단이 제1회 응씨배 세계선수권의 우승컵을 차지한 것이다. 승부는 4국이었다. 그때의 치명적인 ‘한집’에 녜웨이핑은 이미 깊은 내상을 입은 것이었다.

저녁 때 조 9단은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 혼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엔 40만 달러 수표가 든 하얀 봉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광경은 약간은 신기하고 약간은 쓸쓸했다. 참으로 긴 승부였다. 바둑 사상 처음 보는 대 승부였다. 조훈현 9단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이젠 창호가 알아서 하겠지.”

응씨배 우승으로 은관 문화훈장을 받은 조훈현 9단(왼쪽부터 조남철 9단, 최병렬 당시 문화부 장관, 조훈현 9단, 장재식 당시 한국기원 이사장).

조 9단은 한국 바둑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세계를 제패했지만 아직은 일본이란 절대강자에게서 한줌 배워 온 것에 불과한 한국 바둑이다. 그 대표 격인 조훈현 자기는 나이를 먹었고(37세) 이창호는 불과 14세다. 이창호가 해낼 수 있을까. 아마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김포공항서 시청앞까지 승리축하 카 퍼레이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둔 조훈현은 김포공항에서부터 엄청난 환영을 받았다. 그는 공항에서 시청 앞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이게 아마도 우리나라 마지막 카 퍼레이드가 아닌가 싶다. 신문은 1면 머리기사와 사설, 만화까지 동원해 그를 찬양했고, TV에서 조 9단의 가족들은 만세도 불렀다. 가족들이 방송국에 간 그날 집에 도둑이 들기도 했다. 그런 일회적인 사건들 말고도 조훈현은 이후에도 계속 강자로 군림하며 만 50세 때 제패한 삼성화재배까지 세계대회에서만 모두 11회 우승을 거둔다.

응씨배에서 우승하고 돌아온 조훈현은 거국적 환영을 받으며 공항에서 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인다. 대한민국 마지막 카 퍼레이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패배를 당한 녜웨이핑은 곧장 승부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춘다. 문화혁명의 칼바람 속에서도 헤이룽장성의 돼지우리 당번을 하며 꿋꿋이 버텨냈던 녜웨이핑이지만 이 패배를 당한 뒤엔 허망함이 너무 커 더 이상 집중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창하오 9단이란 훌륭한 제자를 키워냈다. 또 중국 내에서 가장 큰 바둑 도장을 운영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녜웨이핑은 쿵상밍 8단과 이혼하고 미모의 가수와 재혼했다. 그후 다시 이혼과 재혼을 반복했다.

“보이는 힘(力)은 보이지 않는 힘(氣)만 못하고 보이지 않는 힘은 고요함(靜)만 못하다. 삼라만상의 오묘한 조화(妙)는 고요함에서 나온다.” 필자가 조훈현 9단과 녜웨이핑의 승부를 보며 느낀 소회다. 조훈현은 평소 ‘無心’이란 두 글자를 즐겨 쓴다. 선천적인 격렬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조 9단에겐 아마추어 하수들의 바둑을 몇 시간씩 멍하니 구경하는 무심함이 있다. 나는 그 대목이 결정적인 순간 조 9단에게 고요함을 안겨줬다고 생각한다. 녜웨이핑은 당시 기량의 측면에서 조 9단보다 더 강하다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그는 이미 권력을 갖추고 있었고 중국 전역의 기대감은 폭발적이었다. 두 가지 모두 고요함과는 상극적인 것들로 이것들이 결국 결정적인 순간 ‘1집의 패배’를 이끌어내고 말았다. 승패는 덧없는 것이지만 해석하자면 그렇다.

○녜웨이핑 ●조훈현 / 결승전 4국

녜웨이핑 9단이 백1로 밀었을 때 조훈현 9단의 흑2는 무리수. 백이 손을 빼 우상을 젖혔으면 바둑이 끝날 뻔 했다. 녜웨이핑은 그러나 우세를 의식하고 3으로 받아줬다. 이렇게 잘 참던 녜웨이핑이 흑8에서 돌연 손을 빼 9로 변화한 것은 응씨배 결승전 최대의 미스터리다. 이로 인해 두 점을 잃은 녜웨이핑은 1집 차로 역전패했고 그 ‘1집’은 끝내 5국의 완패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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