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후조리’가 필요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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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호 31면

KBS ‘개그콘서트’의 간판 코너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이 설 연휴 뒤 여성들 사이에서 다시 화제다. 주제는 ‘명절에 남편이 하면 안 되는 행동’. 내용인즉 이렇다. 아내가 열심히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TV를 보는 건? 된다. 대신 TV 보면서 웃는 건 안 된다. 무감정으로 봐야 한다. 낮잠 자는 건? 된다. 단, 베개를 베는 건 안 된다. 자연스럽게 잠들어야 한다. 애정남 최효종은 아내들이 친정으로 출발하는 시점도 정해줬다. “설에 세배하고 아침밥 먹으면 바로 출발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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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권은 그 다음이다. “여성들이 명절 치르는 고통은 산고(産苦)와 똑같아요. 아이 낳으면 산후조리 하듯이 명절 끝나면 명후 조리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연휴가 나흘이니 명절 후 나흘은 남편이 알아서 밥 차려 먹고 청소도 해야 합니다.” 방송 후 인터넷엔 ‘명후조리’라는 단어가 오르기 시작했다. 기혼 여성들의 열렬한 갈채와 함께.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나온 건 꽤 오래됐다. 한데 ‘명후조리’란 신조어의 등장은 아내이자 며느리인 내게도 뜻밖이다. 사회적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해도 한국 여성들에게 그만큼 명절쇠기는 아직도 힘든 ‘앓이’인가 보다. 직장 여성은 연휴 직전까지 회사에서 일하고 명절엔 시댁 가서 일을 한다. 전업주부라고 다른가. 평소에도 지겹게 하던 가사노동을 장소만 옮겨 더 많이, 더 집중적으로 반복해야 하니 죽을 맛이다. TV를 보다 낮잠 자는 남편을 보며 ‘저 사람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혹은 ‘다시 태어나면 곤충이라도 좋으니 수컷으로 태어나겠다’ 싶은 생각, 누군가의 아내라면 한 번쯤 해봤을 거다.

그런데 애정남이 하나 놓친 게 있다. 아내들이 ‘명후조리’를 원하는 진짜 이유다. 경험에 비춰보건대 그들이 ‘조리’를 원할 만큼 힘든 이유는 몸보다 정신 때문인 것 같다. 왜 그들은 명절이 지나가면 “명절 며느리에서 비로소 ‘우리집 나’로 돌아왔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 걸까. 올해 설 연휴, 가족과 함께 귀성길에 오른 한 여성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고 꽤나 공감했다. “명절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차례상 준비 때문은 아니다. 낯선 가족의 공기 속에서 3박4일 눈치를 살피고 그들이 원하는 며느리상을 보여줘야 하는 엄청난 정신노동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다.”

“가족의 일원으로 존중받기보다 행사 진행요원 취급 받는 정서적 고통이 상당하다”는 불만도 비슷한 맥락이다. 요컨대 아내들이 느끼는 명절 스트레스의 주된 이유는 남녀 간 노동량 불균형으로 인해 ‘명절=노동절’이 돼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성이 여야 정당 대표를 모두 맡을 만큼 세상이 달라졌는데, 명절을 둘러싼 가부장적 의식구조는 제자리여서일 거다. 그 불일치를, 그 전근대성을 납득하기가 힘들다는 거다.

누군가의 말없는 희생으로 온 가족이 화목한 명절을 보내던 시대는 이제 끝난 것 같다. ‘모두가 행복한 명절’을 보낼 방법을 궁리할 때다. 음식 가짓수와 음식량 줄이기, 음식 장만 분담 같은 소박한 아이디어에서부터 ‘차례를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까지 다양한 제안이 나올 성싶다. 그런 논의를 거듭하다보면 ‘명후조리’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단어는 자연히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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