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이란 딜레마의 비상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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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미국과 이란의 악연은 1953년에 시작된다. 51년 국왕 팔레비는 반(反)외세·민족주의자 무함마드 모사데크의 인기에 떠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했다. 그때도 이란 경제는 전적으로 석유에 의존했고, 영국계 석유회사가 이란 유전을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도 이란 북부에 대해 영국과 동등한 이권을 요구했다. 모사데크는 유전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영국은 이란 자산동결로 맞섰지만 모사데크의 인기만 높여줬다. 결국 영국은 물러가고 미국이 그 힘의 공백을 메웠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중앙정보국(CIA)을 동원해 쿠데타로 모사데크를 실각시켰다. 모사데크는 3년간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실권을 회복한 국왕 팔레비는 미국의 경제적인 이권을 충실히 지키고 키워주면서 비밀경찰 사바크(SAVAK)에 의한 악명 높은 백색테러로 나라를 통치했다. 그는 중동의 맹주가 되는 꿈을 키워나갔다. 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면서 미국의 시련은 시작되고, 그 시련의 21세기판이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요, 그것이 한국·일본·유럽연합(EU) 같은 나라들의 경제에 무거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큰 그림으로 보면 미국·이란 갈등의 세 개의 축은 중동지역 석유 이권과 이스라엘의 안전보장, 중동의 패권다툼이다. 미국의 이스라엘 편향 정책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의회가 이란 제재 조항을 끼워넣은 국방예산법안을 거의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것도 선거의 해에 유대계 유권자들의 표와 헌금을 의식해서다. 그래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란 제재를 점진적으로 하자고 의회를 설득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세계 도처에서 내정간섭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민주주의의 기본가치인 인권을 주장하는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일대의 세습 전제군주들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것도 석유이권 때문이다. 아랍의 역사는 잉크가 아니라 석유로 기록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91년 아버지 부시 정부가 다국적군을 편성해 후세인의 이라크군을 축출한 걸프 전쟁도 석유 이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호메이니가 세운 이란 이슬람공화국과 후세인의 이라크는 80년부터 88년까지 아랍의 맹주 자리를 놓고 전쟁을 했지만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아들 부시가 후세인을 제거했을 때 이란은 호기라고 반겼지만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의 이란 포위를 풀지 않았다. 마침내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군하고 아프가니스탄에 최소한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란의 숨통은 트이지 않았다. 아랍에 몰아친 재스민 혁명이 무바라크와 카다피 같은 경쟁자를 치워준 것은 이란에 축복이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로(SNS)로 무장한 시민파워가 반신정(半神政), 반세속 정부라는 기이한 형태의 정권에 언제 도전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살아있다. 이란이 북한처럼 핵무기 개발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는 의혹은 이스라엘을 자극하고, 이스라엘의 불안이 워싱턴으로 전파돼 오늘의 사단이 벌어졌다.

 일본과 EU·호주는 이미 미국의 이란 제재 동참을 결정했다. 한국은 참여 방식과 수준의 결정을 미루고 있는데 그 결정이 쉽지 않다. 이란은 한국에 70억 달러가 넘는 황금시장이다. 이란 진출 기업이 2000개가 넘고, 삼성과 LG의 휴대전화는 이란 시장의 30%를 차지한다. 한마디로 미국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들어줄 처지가 아니다. 다행히 국방예산법에는 이란에서 수입하는 석유의 양을 상당히(Significantly) 줄인 나라에 대해서는 제재에서 면제하거나 적용을 늦출 수 있다는 예외조항이 있다. 한국이 지난해 12월에 수입한 이란 원유는 11월에 비해 46.5% 감소했다. 미국이 이란 제재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한국은 꾸준히 원유 수입량을 줄여왔다. 원유 수입을 줄이고, 이란 은행과 거래하는 은행이 정부 통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확실하면 이란 중앙은행과의 거래를 계속할 수 있다는 예외규정에 비상구가 보인다. 한국의 경우는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이 이란 중앙은행과의 원화결제계좌로 수출대금을 받을 수 있게 창구를 통일했기 때문에 ‘정부 통제’가 듣는 경우에 해당된다.

 미국은 국제금융거래의 동맥이다. 미국에서의 거래가 차단되면 은행이 입는 타격은 치명적이다. 그것은 미국의 가공할 현실적인 압력 수단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북한·이란의 핵커넥션이 수상쩍게 들려도 그런 내색을 하지 말고, 이란 핵무기 보유라면 우리도 용납 못한다고 큰소리를 내면서 원유수입량 감소 조치의 실적을 들어 예외규정을 적용받는 데 외교력을 쏟아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