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인·장미희가 찾던 미용사, 밤마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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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서울 압구정동의 한 건물 2층에 있는 미용실. 한 손엔 가위를, 다른 한 손에는 빗을 든 주진예(64)씨의 손이 쉴새 없이 움직인다. 분홍 립스틱을 바른 그의 입에선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노래 리듬에 맞춰 주씨의 손도 덩달아 춤춘다.

40여 년 전, 미용 일을 시작한 주씨는 1970년대에 연예계 트로이카로 불린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단골로 뒀다.

20여 년 간 서울 명동 일대 미용실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그는 1990년대 중반 독립해 부천역 앞에 40평형대 조희 미용실을 냈다. 당시만 해도 서울 도심이 아니고선 큰 규모의 미용실이 드물었다.

“미용실 스태프로 일할 때 상권을 눈여겨 봤어요. 명동은 이미 포화상태였거든요. 그러다 인구는 많은데 아직 상권이 크지 않은 부천이 눈에 띄었어요. 독립하자마자 부천역사 맞은 편 건물을 계약했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이 몰려들었다.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는 건 예사고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온 손님도 있었다. 그가 거느린 미용사만 30여명에 이르렀다. 부천에 이어 안양·서울 명동에 잇따라 진출한 그는 어느덧 4개 지점을 거느린 미용실 원장이 됐다. 운전수를 두고 각 지점을 옮겨 다니며 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던 어느 날, 남편이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며 “퇴근하면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서 간호하다 잠들고, 다음날 또 미용실에 출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나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주씨는 매일같이 ‘어떻게 하면 빨리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우울증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30년째 그에게 머리를 맡긴 단골이 미용실을 찾았다. “자기가 결혼을 하든, 해외여행을 가든 제가 언제나 이 자리에서 머리를 해주고 있다는 거에요. 그 말을 듣고 돌이켜 보니 제 인생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더군요. 그걸 깨달으니 ‘빨리 죽고 싶다’던 생각이 ‘빨리 죽으면 어쩌지’로 바뀌었어요.”

주씨는 그 길로 사업을 정리했다.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주씨는 우연한 기회에 동네 문화센터 노래교실에 등록했다. 노래에 재미를 붙인 그는 이왕이면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에 전문 보컬 트레이너를 찾았다.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운지 5년여.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음반제작 일을 하는 지인이 가수 데뷔를 권한 것이다.

“처음엔 환갑이 넘어서 무슨 가수냐며 펄쩍 뛰었죠. 근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못할 것도 없었어요. 젊었을 때부터 다시 태어나면 나미나 김완선 같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굳이 다음 생까지 미룰 필요가 없잖아요(웃음).”

그는 지난해 말 첫 앨범인 ‘나만을 믿어봐’를 발표했다. 흥겨운 리듬의 가사에는 ‘우리 앞엔 행복이 있잖아’ ‘산다는 건 행복이야’ 등 ‘행복’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 자살을 시도했던 주씨는 이제 그렇게 행복을 노래한다. 앨범을 발표하던 날, ‘살롱 드 주’라는 상호의 미용실도 다시 열었다. 동네 상가에 위치한 15평 남짓한 공간은 주씨가 한창 잘나가던 때와 비교하면 초라해 보인다.

“젊을 땐 남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것만 고집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아침에 미용실로 출근하는 길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어요. 제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주씨는 저녁 7시 반이면 미용실을 나선다. 8시부터 방배동 라이브클럽에서 공연이 있기 때문이다. 총총걸음으로 노래를 부르러 가는 이 ‘신인가수’의 뒷모습에서 행복이 묻어났다.

허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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