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의사의 의료계 현장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규홍 Books 편집장

#01. 의대생들의 축제를 행림제(杏林祭)라고 한다. 여기에는 중국의 〈신선전〉에 전해오는 고사가 담겨 있다.

중국 삼국시대의 오(吳)나라에 죽은 송장도 살리는 동봉이라는 명의(名義)가 있었는데, 그는 병을 치료한 대가로 그 마을에 살구나무를 심게 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나자 마을에는 자연히 살구나무 숲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동봉은 마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살구를 나누어 먹게 했고, 건강에 좋은 살구를 많이 먹은 마을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봉은 또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도 남은 살구 열매를 곡식으로 바꿔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한다.

몸의 병이 든 사람에게는 의술을, 가난의 병이 든 사람에게는 인술을 베푼 것이다. 동봉은 죽은 뒤 동선이라 칭송됐고, 그 마을의 살구나무 숲을 '행림'이라고 불렀다. 그 뒤로 행림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를 상징하게 됐다고 전한다. 의대생들의 축제를 행림제로 부르는 것도 역시 의술과 인술을 함께 베풀어야 한다는 뜻에서 그리한다고 한다.

#02. 지금 우리 의료업계를 놓고 말이 많다. 죽어가는 환자를 외면하고 자기 밥그릇만 챙긴다고 하여 의사들을 마치 '천하의 몹쓸 놈들' 취급하는 현실에서 의사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 나왔다. 〈누가 히포크라테스를 죽였는가〉(김영훈 지음, 리더스 펴냄)는 현직 의사이며 서남대 의대 교수인 지은이가 자신의 직업에 대한 생각과 의료대란을 겪으며 하나의 의사로 느낀 생각들을 풀어놓은 흥미로운 수필집.

지은이는 환자에게 친근함을 느끼지 않고 다만 계약관계에 의한 최소한의 성실성만 갖추는 식으로 변화한 의사들의 모습에 비애를 느낀다. "인의(仁義)도 환자들을 향한 도덕적 책임감도 사라졌다. 다만 모든 이의 합의된 교살 속에 널부러진 히포크라테스의 사체 위에 무심한 이들의 거친 발자국만 늘어나고 있을 뿐"이라는 비애 섞인 감정으로 글을 시작한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멱살을 잡혀야 하고, 고소를 당하는 일 등으로 고초를 겪은 의사들은 그 어려운 수련 과정을 생각하더라도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같은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생명의 신비함과 소중함, 다른 이를 위해 나를 버릴 때 느끼는 기쁨" 등을 의사로서 느끼는 기쁨이고 희망이라고 주장한다.

변화한 의료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 지은이는 병원의 문을 닫고 주유소를 차린 동료 의사이야기, 별다른 외상도 없는 폭행 관련 환자가 4주 이상의 진단서를 내놓으라며 외진 곳에서 칼을 들이대며 협박하던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며 의사라는 직업이 예전과 달리 존경받는 직업도, 신성한 직업도 아닌 것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같은 현실에서 의사 스스로가 자신의 자긍심과 명예를 지켜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시험의 부정행위만큼은 용납 못하는 의과대 강의, 단정치 못한 의사들의 복장, 의사들의 저속한 언어 습관 등을 예로 들며 의사들이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원인을 찾아내고자 애쓴다. 의사가 대접받지 못하게 된 원인을 지은이는 의사 개개인과 의료계 내부에 있다고 짚어낸 것. 결국 의사에 대한 신뢰는 의사들 스스로가 쌓아나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어 지은이는 가치관을 성숙시켜야 할 젊은 시절을 의과대 수업과 성적 경쟁에 몰두하느라 현실을 외면해온 의사들을 비판한다. "의사는 단편적인 의학 지식만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성숙되어지지 않는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 의사는 환자의 질병 뿐 아니라, 심리적 스트레스에서부터 가정 형편, 직업상의 문제점까지 고루 보살펴야 한다는 것. 결국 의사라는 직업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삶의 경험과 깊이가 필요한 직업이라고 강조한다.

이밖에 일반인들이 알기 힘든 의료계 내부의 문제점들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가고 있어, 오늘날의 의료계 현실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책의 말미에는 최근의 의약분업 관련 사태에 대한 지은이의 생각도 정리하고 있다.

#03. 의약분업은 의사와 약사와의 관계에서 빚어진 문제인데, 이 사태를 떠올리면, 약사와 한의사 간의 분쟁으로 전국의 약국들이 폐업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의사와 약사의 파동이 한 차례 흘러간 뒤에, 다시 약사와 한의사와의 관계도 재조정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일부의 관측이 있어 더욱 그러하다.

이 즈음에 한의과 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현직 한의사가 한의학계의 현황을 알기 쉽게 쓴 글들을 엮어 펴낸 에세이 모음집 〈디지털시대를 사는 허준의 후예들〉(김성수 엮음, 태일출판사 펴냄)도 눈길이 가는 책. 이 책은 엮은이가 출강하고 있는 한의과대 학생들이 한의학계의 현실을 취재해서 쓰거나 혹은 경험담을 그대로 적은 것을 엮은이가 전면적으로 손을 본 뒤 순서에 맞춰 엮은 것이다.

얼마 전 종영한 방송 드라마 〈허준〉은 일반인에게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높여주었고, 한의사들에게는 자긍심과 사명감을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은 드라마 〈허준〉을 열심히 보던 지은이가 현재 한의학계의 모습을 진솔하게 나타내고 한의학이 일반 대중들에게 친숙한 학문으로 다가갈 수 있게 하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지은이의 정성스런 교열로 마치 한 사람의 지은이가 쓴 것처럼 전체적인 맥을 가지고 있다. 한의대, 한의원, 한의학계의 현황을 유쾌하게 읽을 수 있도록 흥미로운 에피소드들로 소개하고 있으며, 네번째 장에서는 허준을 비롯한 화타, 편작, 이제마, 석곡 등 역사상 한의학의 명의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책의 첫째 장인 한의대 시절 이야기는 대학생들 특유의 활기와 유쾌함이 살아있는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어서, 한의학과 무관한 독자들도 저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한의원에서의 임상 에피소드 또한 흥미로운 부분.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했던 한 임산부가 한의원에서 아이가 거꾸로 서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바로 서게 해달라고 애걸한 이야기등은 재미있게 읽힌다. 글쓴 이는 이같은 에피소드 안에서 한의 방식의 치료는 단순히 훌륭한 약효를 가진 약에 의한 처치도 중요하지만, 의사와 환자의 정성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한의사들의 이야기에도 역시 한약분쟁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지금 의사와 대립하고 있는 약사들과의 대립으로 빚어졌던 사건이다. 한약은 주변의 음식들을 사람의 체질과 질병의 증상에 맞게 처방하는 것이지만, 절대로 아무나 조제할 수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게 이 책의 생각. 이어 지금의 의료대란을 바라보며 약사와 한의사의 또 한번의 파동을 예감하기도 한다.

한의학계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육성을 담은 이 책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은 때론 웃음을, 때론 감동을 남긴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에피소드 안에서 한의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잘못된 생각도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04. 대체조제니 혼합조제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난무하며, 아픈 사람들만 괴롭게 하는 현실이다. 문을 닫고 정부의 의약분업 정책에 항의하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무조건 '밥그릇 싸움'으로 닦아세우는 것도 옳아 보이지는 않는다.

이제는 의사도 한의사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기 힘든 전문용어만으로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언어로 알려야 한다. 〈누가 히포크라테스를 죽였는가〉의 준엄한 문장으로, 혹은 〈허준의 후예들〉의 흥미진진한 문장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알려야 한다.

병원 문을 닫고 정부 정책에 항의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현재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고 일반 국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에도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의사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아쉬운 시절에 한의(韓醫)와 양의(洋醫)가 각각 낸 자신들의 책에 눈길이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게다.

죽어서 신선 대접을 받는 중국의 명의 동봉처럼은 아니더라도 민중의 삶 속에서 민중과 함께 호흡하는 명의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한 책들

* 누가 히포크라테스를 죽였는가 (김영훈 지음, 리더스 펴냄)
* 디지털 시대를 사는 허준의 후예들 (김성수 엮음, 태일출판사 펴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