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얼굴] '체조 요정' 나디아 코마네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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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 투수의 완벽투구를 지칭하는 퍼펙트게임은 1880년에 처음으로 나왔다. 클리블랜드 리 리치몬드가 그 주인공. 27명의 타자를 상대로 단 한명도 1루에 내보내지 않는 완벽투구에 美프로야구계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처럼 한 분야에서 '완벽'이라는 말은 경이스럽게 다가온다. 체조에서 완벽 연기라 함은 10점 만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10점이라는 스코어는 성역으로 여겨졌었다. 아니 컴퓨터시스템 자체에 10.0이라는 수치가 입력이 안돼 있었다. 단지 누가 더 좋은 연기를 펼쳐서 금메달을 딸 것인지에 관심이 갔을 뿐이다.

하지만 루마니아의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38)가 전인미답의 10점 만점 고지에 최초로 올랐다.

시간은 24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76년 7월 18일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장. 키 153cm, 체중 39kg의 갸날픈 몸매를 지닌 14세 어린 소녀가 이단평행봉에서 현란한 연기를 펼쳤다. 모두들 숨죽이면서 결과를 지켜보는 순간 전광판에는 ‘1.0’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10점 만점이었다. 당시 전광판에서 표현할 수 있는 점수는 9.99가 최고였을 뿐 10.0은 없었던 터라 1.0으로 표시된 것이었다.

세계체조 사상 최초의 10점 만점 연기를 지켜본 관중들로부터 나온 우뢰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경기장을 떠나지 않았다. 코마네치는 이 대회에서만 7번의 10점 만점 연기를 펼치며 개인종합과 이단평행봉, 평균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코마네치는 4년 후 1980년 도쿄올림픽에서도 평균대와 마루운동에서 우승을 차지, 올림픽 통산 5개의 금메달을 거머쥐며 ‘체조 요정’에서 ‘체조 여왕’으로 떠올랐다.

그는 1961년생으로 6살 때 세계여자체조의 ‘마이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카롤리 코치에 의해 발탁되며 맹훈련을 받았다. 72년 공산주의 국가연합 청소년 체조선수권대회에서 3개 부문에서 1위에 오른 그는 73,74년에는 동 대회에서 전종목을 석권하며 대스타로서의 성장을 예견시켰다.

75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따냈고 이듬해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10점 만점 연기를 펼치면서 세계체조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코마네치는 올림픽이 끝난 후 고국으로 돌아와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세스쿠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의 영웅’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루마니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국제대회에서 31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그는 84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시티의 스포츠광장에서 은퇴식을 갖고 찬란하고 화려했던 체조인생을 마감했다.

코마네치가 고국 루마니아에 체조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기며 영웅 칭호를 받았지만 은퇴를 전후해서 여러 가지 안 좋은 상황이 벌어졌다. 그의 남자친구의 국외 추방과 LA올림픽 이후 해외취업·여행 금지, 5년간 가택연금 외에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아들인 니쿠로부터의 성폭력은 그를 더 이상 루마니아에 발붙이고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89년 말 헝가리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한때 ‘애정의 도피행각’이라는 여론의 차가운 시선에 직면해야 했지만, 광고모델과 TV출연 등으로 면면히 삶을 유지해오다가 96년에 LA올림픽 철봉 금메달리스트인 버크 코너와 결혼한 후 현재 오클라호마주에서 남편과 함께 체조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완벽’. 이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현기증까지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운동선수들(또는 사람들)이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일에 있어서 종국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이데아’다.

최근에는 10점 만점이 빈번하게 나오지만 코마네치의 최초 10점 만점 연기는 당시로서는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이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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