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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돈봉투’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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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박태준 전 포철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준 금일봉으로 북아현동 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도 그랬다. 부패하지 않고는 봉급으로 집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금일봉으로 집을 마련한 사람은 이들만이 아니다. 최근 황병태씨는 그의 저서 『박정희 패러다임』에서 박 대통령이 그에게 AID차관 독촉을 위해 워싱턴 장기출장을 명했을 때 금일봉을 주어 번듯한 호텔에 투숙하고 그곳 사람들을 괜찮은 식당에 초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부출장비 규모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금일봉은 박 대통령의 용인술과 국가통치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금일봉으로 그는 사람과 당과 국가를 다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역시 그의 금일봉을 받아보지 않은 측근은 없다고 한다. 측근뿐 아니라 유력인사, 여론주도층들도 직접 혹은 그의 참모들을 통해 금일봉을 받았으며 전군지휘관, 여당 당료, 주요 공직자들에게 수시로 하사금이라는 이름으로 봉투가 전달되었다고 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최근 그의 회고록에서 처음에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으려 했으나 막상 집권을 해보니 ‘살필 데’가 너무 많았다고 한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시대는 잘 모르겠으나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 와서 이 금일봉이 확실히 없어졌다. 필자는 첫 2년간 청와대 경제보좌관으로 일했으나 그로부터 금일봉을 받은 적도, 대신 전달해본 적도 없다. 다른 수석 보좌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적 동력은 ‘보상체계’다. 이 보상체계에 따라 그 사회의 인재의 흐름이 결정되고 일에 대한 열성과 충성도가 달라진다. 높은 보상이 있는 곳에 인재가 모이고 성과급이 높으면 일에 대한 집중도도 높아진다. 그러나 후진사회일수록 이 보상체계가 투명하지 않다. 겉으로 보이는 보상체계와 보이지 않는 보상체계가 다른 것이다. 그만큼 부패가 깊고 법의 보편적 적용이 어렵게 된다. 법의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운이 없어 그렇다고 믿는다. 보상체계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아직도 후진국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보상의 비중이 높다.

 지금 정당들이 외쳐대는 쇄신이나 검찰 수사로 돈봉투 관행이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돈봉투의 관행은 우리 사회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꾸려면 결국 우리 사회의 전반적 시스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아직 돈봉투 관행을 우리 사회가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라 생각하고 있다. 박정희의 용인술과 국가경영을 칭송하고 노무현의 아마추어리즘을 조롱하는 사람들이 금일봉과 정경유착, 권력기관의 사적 도구화의 폐해를 함께 논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늘 양면성이 있다. 어느 한 면만 보아서는 냉정한 평가도, 문제의 해결책도 나오지 않는다.

 봉투사회는 세계화와 민주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다.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이는 일과성 캠페인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정치자금법, 정당조직과 운영방식, 공직자의 보수체계, 나아가 정치시스템 등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봉투 없이도 정당이 잘 운영되고 당정협조가 원활하며 공직자들이 그들의 지위와 노력에 상응하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직업관료시스템에 의존하면서 장관의 보수가 대기업 부장 수준도 안 된다. 30년을 주요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으로 일하며 자녀교육과 가정생활을 희생하기를 국가가 요구하며 동시에 국가에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오늘날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다. 부정의 유혹에 흔들리고 봉투의 관행에 젖도록 방조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대통령이 기업들로부터 돈을 걷어 부정을 독점하고 당료·관료들에게 배분해 이들의 실질적 보수를 높이고 충성을 유도했다. 이것이 사라진 후 행정·사법·입법부의 공직자들은 사기업·산하기관·변호인·‘스폰서’의 후원에 더욱 취약하게 노출되었다. 이들의 공무처리가 국가의 이해가 아닌 사적 이해에 좌우되는 사회는 오히려 대통령의 금일봉에 의한 사회보다 더 위험하고 부패한 사회다.

 돈봉투 관행을 없애려면 우리 사회의 비현실적이며 비합리적 제도를 개편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위에서 부정을 엄격히 처벌해 나가야 한다. 정치권이 진정 쇄신을 원한다면 국민 앞에 무릎 꿇는 사진을 돌리기보다 총선과 대선에서 전반적인 국가시스템 개혁에 대해 현실적이고 구체적 계획을 용기 있게 제시하기 바란다. 국민들이 세금을 더 걷더라도 정치인과 공직자들을 국민의 공복으로 부리는 것이 이들이 기업과 돈 있는 자들의 이해에 의해 움직이게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