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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다음 달 국채 만기 몰려 재정위기 벼랑 끝으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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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호 20면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서 신용등급 강등 사실을 전해 듣고 파리 엘리제궁에서 긴급각료회의를 주재한 뒤 회의실을 나서고 있다. 표정이 어둡다. [파리 AFP=연합뉴스]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의 쓰나미가 유럽연합(EU)의 중심부까지 휩쓸기 시작했다. 미국 국제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13일(현지시간) 유로존 9개국의 등급 강등과 총 14개국의 부정적 신용전망을 발표한 것이다. EU 강국으로 독일과 함께 유로존 재정위기의 해결사를 자임해 온 프랑스가 등급 강등의 직격탄을 맞았다. ‘돈줄’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까지 최고 등급(AAA)을 상실할 위기에 몰리면서 유로존은 연초부터 난국을 맞았다.

EU 신용등급 무더기 강등 파장

유로존의 무더기 신용등급 강등은 글로벌 금융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로존 위기가 중심부로 확산될 것’과 ‘예상된 강등이라 충격이 작을 것’ 사이에서 전문가 시각이 엇갈린다. 어쨌든 유로존 17개국 중 14개국이 사실상 ‘신용불량’ 수준의 딱지를 받으면서 그 파장이 적잖을 전망이다.

국가 신용등급 강등은 이들 국가의 국채금리 상승과 수익률 하락으로 이어진다. 그만큼 국가가 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릴 때 차입비용이 늘어난다. 안전자산으로 여겨진 프랑스의 국채로 자금을 빌린 은행들은 담보가치 하락으로 연쇄적인 피해를 본다. 이들 은행이 대출을 줄이거나 금리를 올리면 실물경제도 영향을 받는다. 다이와캐피털마켓의 레이 레미 국채 부문장은 “등급 강등의 잠재 위기에 노출된 나라가 많아 미국 등 여러 나라의 국채 수익률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로존의 자금 실탄 역할을 해 온 EFSF의 신용등급이 ‘AAA’에서 떨어지면 국제 금융시장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달을 수 있다. EFSF는 프랑스가 재원의 20% 정도를 지원한 터라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UBS의 크리스 아렌스 국채 전략가는 “EU 위기는 많은 국가가 연결된 구조적 문제라 단시일에 쉽사리 해결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유로존 두 번째 경제대국인 프랑스는 등급 강등을 애써 외면하면서도 난처한 표정이다. 우선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재정 긴축 드라이브가 타격을 받게 됐다. 4월 22일 대선 투표가 코앞에 다가와 더 이상 개혁 고통 분담을 부르짖을 상황이 아니다. 사르코지 대통령과 프랑수아 바루앵 재무장관은 이날 긴급 각료회의를 연 데 이어, 바루앵 장관이 TV에까지 출연해 신용등급 강등의 파장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바루앵 장관은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재앙이 닥친 것도 아니다. 추가 긴축정책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탈리아도 신용등급 강등 여파로 재정위기 실타래가 다시 꼬였다. 국내총생산(GDP)의 120%에 달하는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올 들어 5년물 이상 국채 등을 성공적으로 발행했지만 다음 달에도 국채를 대량 매각해야 한다. 이번에 등급이 떨어지면서 국채 금리와 채무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 그리스도 답답한 상황이다. 12∼13일 아테네에서 루카스 파파디모스 그리스 총리와 찰스 달라라 국제금융협회(IIF) 사무총장이 2차 구제금융을 논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리스는 구제금융 없이는 144억 유로(약 21조원) 국채가 돌아오는 다음 달 말께 디폴트 위기에 몰린다.

한편에선 이번 유로존 무더기 등급 강등이 지난달부터 예고돼 이미 시장에 반영된 터라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AFP 통신사는 지난해 8월 S&P가 갑작스레 미국의 국가등급을 최고 수준에서 한 계단 강등했지만 타격은 예상보다 덜했다고 평가했다. 유로존 등급 강등은 한 달 전부터 예고됐고, 피치·무디스 등 다른 신평사들이 아직 동조할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벼랑 끝에 몰린 유로존이 23일 EU 재무장관 회의, 30일 EU 특별 정상회의에서 파격적인 돌파구를 제시할 수도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정부 부채 또는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회원국의 원리금 상환 부담을 나눠 갖는 ‘유로 본드’를 도입하고, 유럽중앙은행(ECB)에 대한 최종 대부자 역할을 부여하며, 신속하고 대규모의 EFSF 재원을 확충하는 단기 극약 처방을 단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내에서는 유로존 신용등급 강등이 단기 충격보다 중장기 악재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신용등급 강등이 2~4월 대규모 만기가 도래하는 남유럽 국가들의 국채 가격 하락을 불러오면 국내 금융시장의 유럽계 자금 이탈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다만 예상된 악재인 만큼 지난해 미국 신용등급 강등과 그리스 국가부도 위기 때보다는 자금 이탈 규모나 주가 하락 폭은 훨씬 적을 것으로 기대했다. 한국국제금융학회장인 오정근 고려대(경제학) 교수는 “이달 30일 EU 정상회의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 당장 국내에서 유럽계 자금이 대거 빠져나가진 않을 것으로 본다. 이달 말까지는 투자자들이 ‘관망세(wait and see)’를 견지해 금융시장 변동성도 크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조익재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도 “신용등급 하락이 예상된 가운데 장을 마친 13일 유럽 금융시장을 보면 주요국의 국채 수익률이 비교적 안정됐고, 주가도 소폭 하락한 수준이다. 한국은 월요일인 16일 정도만 영향을 받을 뿐 단기적으로는 영향이 작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용등급 강등의 파장은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이종우 솔로몬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다음 달부터 이탈리아·스페인 등 재정위기국의 국채 만기가 도래하면 유럽계 투자자들은 국내에서 어느 정도 자금을 회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정근 교수는 “EU정상회의에서 대타협이 나오더라도 불안하다. 남유럽의 이행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2월 이후에는 유럽 자금 중 상당 부분이 국내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분야별로는 채권보다 주식에 영향이 클 것으로 예상했다. 이종우 센터장은 “채권시장의 외국인 투자가 비중은 5%에 불과하지만 주식시장은 35%이고, 그중 유럽계 자금이 두 번째로 많다. 자금 이탈이 본격화하면 현재 1870선인 코스피지수가 1750선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외환시장에서 원화 약세가 가파르게 진행될 것으로 보지도 않고 있다. 조익재 센터장은 “원화 약세의 요인이지만 현재 달러당 1150원인 원화가치가 1200원 수준까지 갈 사안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실물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오정근 교수는 “유럽은 올해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할 공산이 커졌다. 유럽은 한국 전체 수출액의 11%를 차지하는 큰 시장이다. 수출 경기가 둔화될 수 있는 요인이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이 긴축 완화를 통해 연착륙하고, 미국의 경기 회복이 이뤄지면 유럽 악재를 상쇄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이원기 PCA자산운용 대표는 “유럽은 마일드 리세션(Mild recession, 완만한 경기 침체), 미국은 마일드 리커버리(Mild recovery, 완만한 경기 회복)로 방향이 잡혔다는 것이 글로벌 투자자들의 공감대”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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