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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새로운 거짓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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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마이클 그린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일본실장

김정일 사망이 지난 연말 언론에 크게 보도된 것에 비해 한동안 북한 관련 큰 뉴스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 11일 북한이 미국과 진행중인 대화에 실망했지만 “대화는 열려 있다”고 밝힌 일이 세계 각국 언론에 크게 다뤄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 표명은 전술적 움직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북한과의 외교 노력을 가로막는 근본적 장애요소들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11일 북한 언론이 외무성 고위 관료와 인터뷰를 했다며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해 7월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중단하면 식량을 지원하겠다고 제의했다. 그런데 미국이 이제 와서 당초 30만t의 식량 지원에서 어린이와 노인층을 대상으로 한 비타민과 과자 등 ‘영양 지원’으로 입장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북한 외무성은 또 우라늄 농축 중단의 대가로 대북 제재도 중단할 것을 제의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미국의 입장 변화를 비판하면서 미국이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야 대화가 진전될 수 있다고 천명했다.

 미 정부는 북한과 대화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주장에 대한 설명은 가능하다. 우선 미국은 북한의 부족한 식량 생산을 평가한 끝에 지원하는 문제를 논의했으며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임박해 거의 합의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또 미 정부는 핵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대화와 식량 지원을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연결시켰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주장대로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은 몇 년 전부터 군대로의 전용 가능성이 낮은 비타민과 비스킷을 지원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미 국무부가 ‘식량 지원’ 대신 ‘영양 지원’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한 점이 북한을 자극했을지 모르지만 미국이 어떤 방식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점은 북한이 익히 알고 있었다. 북한은 유리한 협상을 위해 잔꾀를 부리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사실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의 유일한 조건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품이 제대로 전달돼야 한다는 점뿐이다. 이 문제는 따로 칼럼을 써야 할 주제다).

 우라늄 농축 중단에 대한 대가로 미국이 대북제재를 해제하겠다고 제의했다는 북한의 주장은 이렇다. 얼핏 생각하면 북한과의 과감한 ‘대타협(그랜드 바긴)’ 가능성이 열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면밀한 관찰이 필요한 문제다. 2004년 6월 부시 대통령 시절 미 정부는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방법으로 완전히 폐기한다면 제재를 해제할 수 있다고 제의한 적이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미국 외교관들이 협상의 종착점으로 유사한 제안을 했을 것인가.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모호하고 검증이 어려운 방식의 북한 핵 프로그램 동결을 대가로 부분적인 제재 해제를 제안했을 것인가. 두 가지 점에서 가능하지 않다. 우선 2008년 10월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에 대해 북한이 제시한 검증 절차를 받아들이고 일부 제재를 해제하기로 한 결정은 실수였다는 것이 미국 내 보편적인 견해다. 미·일 관계나 한·미 관계에 큰 타격을 입혔음에도 북한은 아무런 검증 절차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두 번째 핵실험이 있은 뒤에 했던 2008년의 양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려 한다면 언론은 물론 공화당 측 후보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북한 외교부 발언은 북·미 간에 의미 있는 외교적 진전이 현재로선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이 계속해서 합의사항을 어기는 상황에서 미국으로선 미국이 놀아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장하고 검증할 수 있는 방안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반면 북한은 플루토늄 핵 기술과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진전시키는 만큼 미국에 대해 더 큰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이에 대해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대변은 이번 주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재확인했다.

 북한이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면서 대화는 열려 있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북한은 100일간의 김정일 상(喪) 기간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충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쯤 될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한·미·일로부터 자신들이 주장해온 ‘강성대국 첫해’를 기념할 만한 지원을 끌어내려 할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북한이 2012년 완전한 핵 보유국이 됐다고 선언하기까지 얼마나 걸릴 것인가만 남는 것이다.

마이클 그린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일본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