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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천국의 신뢰 성적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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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런던 특파원

‘레가툼 번영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라는 지표가 있다. 영국의 공공정책 싱크탱크인 레가툼 연구소가 2007년부터 해마다 한 번 발표한다. 경제·교육·보건 등 8개 분야를 평가해 점수와 등수를 내놓는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와 더불어 흔히 어떤 나라가 얼마만큼 살기 좋은 곳인지를 보여주는 자료로 활용된다. 지난해 말 공개된 2011년 성적표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110개국 가운데 24위를 기록했다. 전년보다 순위가 세 계단 높아졌다. 1위는 단골 최우등생 노르웨이가 차지했다.

 한국은 교육 부문에서 6위에 올랐다. 경제는 22위, 보건은 21위. 그런데 국가의 통합성을 주로 측정하는 ‘사회적 자산’ 항목에선 전체 국가의 중간 수준인 52위다. 이 부문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은 주로 ‘사회적 신뢰성’ 문제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는 설문에 26%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느냐”는 질문에 18%의 한국인은 “없다”고 답했다.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 문제에서는 3분의 2의 응답자가 “신뢰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은 이 부문에선 70, 80위권 수준이다.

 발표 내용을 보면 한국은 매우 일그러진 나라다. 교육 수준은 높은데 국민 간의 신뢰는 바닥권인 독특한 국가다. 종교집단의 구호에 등장하는 ‘불신지옥’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이 지수가 얼마나 정교히 측정되는지를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최근 한국의 상황을 보면 수치를 부정하기가 어렵다. 예리한 관찰에 허를 찔린 느낌도 든다.

 아나운서들을 부정한 행위를 일삼는 사람들로 매도하고, 이를 폭로한 기자를 고소하기까지 해 당적을 박탈당한 국회의원은 여전히 타인들을 공격하느라 바쁘다. 한 가수의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 위조를 줄기차게 주장해온 블로거는 이젠 아예 “이 대학의 한국인 동창 460명의 학력이 모두 가짜”라고 외친다. 판결 불만 때문에 살상무기인 석궁을 들고 판사를 찾아갔던 전직 대학 교수가 일각에선 ‘정의의 사도’처럼 묘사된다. 명예훼손 혐의로 1, 2, 3심 모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전 국회의원은 자신이 정치적·사법적 음모의 희생양이라고 우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을 개혁가로 추앙하는 분위기가 꽤 폭넓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원치 않는 진실은 거짓이라고 믿는다. 내 편이 말한 것만 진실인데, 그 편은 쉽게 바뀐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원인은 포괄적일 것이다. 진실 찾기가 주요 임무인 기자로서 자책감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레가툼 지수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려면 우선 불신의 늪부터 메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 같은 범국가적 기구를 만들어 종합 처방을 강구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가슴이 답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