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념 틀’ 벗어난 범국민 정당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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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총선과 대선이 이어지는 ‘선거의 해’를 맞아 각 정당들이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여당인 한나라당은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라는 임시기구를 만들어 당을 재창조하는 진통을 겪고 있다. 제1 야당인 민주당은 장외 친노(親盧)와 시민사회세력 등과 합당해 새로운 민주통합당을 만들어 골조 세우기에 바쁘다.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변신의 노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권력장악은 정당의 존재 이유며, 선거과정에서 여론을 수렴하고 대변하는 것은 정당의 본질적 기능이다. 문제는 최근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혼란과 착오다.

 한나라당의 경우 정강·정책에 명시된 ‘보수(保守)’라는 글씨를 두느냐 빼느냐를 두고 혼선을 빚고 있다. 비대위원인 김종인 전 의원이 “요즘 보수란 단어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守舊)’를 떠올리며 거부감을 갖는다”며 “삭제”를 주장했다. 그러자 당내에선 김 위원의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에, 탈당 배수진을 치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착각하지 말자. 문제는 ‘보수’라는 단어가 아니다. 한나라당이 보여준 ‘보수’의 모습이 ‘수구’로 보이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한나라당이다. 집권당인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지난 4년간 낡은 질서에 매달리는 수구의 모습을 보여왔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같은 뉴미디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각종 단속과 심의 등 규제일변도 정책은 시대에 뒤떨어진 집권세력이란 인상을 남겼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측근 비리를 보는 많은 국민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던 대통령의 확신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실책은 양극화의 문제다. 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대기업 프렌들리 정책을 천명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달라진 국제경제·사회환경의 변화에 둔감했다. 과거 박정희식 개발과 성장 일변도 정책이 이미 시대적으로 맞지 않는 상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낡은 방식을 고집했다. 그 결과가 4일 정부(기획재정부)가 내놓은 보고서에서 지적한 ‘사회통합의 결여’다. 거시경제지표는 양호함에도 불구하고 청년실업과 중산층의 붕괴 등 문제가 심화되었다는 자성(自省)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한나라당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 배경이다.

 따라서 한나라당의 변신은 이 같은 사회통합의 위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어야 마땅하다. 이는 ‘보수’라는 단어는 물론 특정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변화와 혁신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비대위가 5일 내놓은 정강·정책의 큰 방향은 제대로 잡혔다고 평가된다. 비대위는 대북 문제에 있어서 ‘유연한 기조’를 강조했다. 이명박 정권이 북한 도발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유연성이 부족해 남북관계가 경직돼 왔던 점을 반성한 궤도 수정이다.

 비대위는 또 양극화 문제와 관련해 공정경쟁과 경제정의를 강조하기로 했다. 이는 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 경제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을 의미한다. 비대위는 또 사회적으로 복지의 그물망을 좀 더 촘촘하고 넓게 짜겠다는 ‘평생 맞춤 복지’ 개념을 도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역시 그동안 성장 일변도에서 소홀히 해왔던 복지의 강화로 주목된다. 과연 이 같은 정책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구체화되고, 실제로 집권 이후 실천될 수 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경우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한 당내 경선이 한창이다. ‘진보’ 선명 경쟁에 빠졌다. 경계해야 할 대목은 경선과정에서 불거지고 있는 포퓰리즘과 좌(左) 클릭이다. 민주통합당은 합당 과정에서 제1 야당이었던 구 민주당보다 훨씬 진보적인 모습으로 거듭났다. 재벌경제 개혁과 복지 확대가 필요하다는 점엔 많은 국민이 동의하지만, 재벌 해체와 보편적 복지의 전면실시가 과연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의문이다.

 지난 4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연설회와 토론회에서 진보신당 출신 당권 후보는 “대기업 사내유보금을 청년 고용기금으로 내놓게 하겠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기업이라면 마땅히 새로운 투자와 위기대응을 위해 보유해야 할 비상금을 내놓으라고 강제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또 합법적으로 가능한 얘기인지 의문이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고 해도 현실적으로 무리하거나 불가능한 강경책은 선거용 포퓰리즘으로 혹독한 검증을 거쳐야 한다.

 현대 정당정치는 이념의 좁은 틀을 벗어난 지 오래다. 정치철학에서 이념이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현대 정당은 특정 이데올로기에 가두어졌던 산업화 시대의 정당과 달라야 한다. 탈(脫)산업화 시대의 정당은 대중 정당(Mass Party), 범국민 정당(Catch-all Party)이어야 한다. 특정 계급이나 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은 공당(公黨)이 아니라 이익집단이다. 수권(受權)을 자임하는 공당이라면 가능한 한 많은 국민을 대변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갖춰야 한다. 현대사회는 다양한 계층과 갈등이 공존하며, 대중의 이해도 그만큼 복잡다양하기 때문이다.

 양대 정당인 한나라당과 민주통합당은 달라진 우리 사회의 변화와 유권자들의 요구를 담아내는 방향으로 변신을 거듭해야 한다.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사고는 선거 이후에도 분열의 상처를 남긴다. 최대한 지지층을 넓히는 범국민 정당으로 나아간다면 양당의 공통분모는 저절로 커질 것이며, 이는 선거를 국민 화합의 장으로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