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로 이룬 ‘한강의 기적’ 유효기간 지났다 … 일자리 많이 만드는 내수 서비스업이 답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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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의 역설 고용 창출 톱10 중 수출 제조업체 3곳뿐 부산항 감만 부두에 수출용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다. 그러나 수출을 많이 해도 일자리는 그만큼 늘지 않는다. 수출주도형 성장모델은 이제 한계를 드러냈다. [송봉근 기자]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이끈 주역은 뭐니뭐니 해도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이었다. 수출로 경제성장과 일자리를 동시에 일궈냈다. 그러나 이제 수출산업이 성장을 이끌 수는 있을지언정 더 이상 젊은이들에게 번듯한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다.

과거의 성장모델로는 제2의 ‘한강의 기적’은 없다.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새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은 내수 중심의 서비스업에 있다. 경제성장과 고용 창출을 함께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성장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내일은 없다.

#1. 지난해 12월 31일 부산의 의류업체 미강패션에는 재봉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밀린 작업을 처리하기 위해 세밑 토요일에도 직원들은 땀을 흘렸다. 이 회사 최병철(55) 대표는 지난해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산업 포장을 받았다.

그러나 미강패션은 수출 실적이 단 한 건도 없는 회사다. 상을 받은 이유는 고용 창출이다. 2002년 8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종업원 300명의 회사로 성장했다. 철저한 분업으로 생산성을 높여 고임금의 약점을 극복했다. 최 대표는 “서민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줬다는 것이 기업가로서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섬유업체가 수출이 아닌 고용으로 상을 받았다는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섬유산업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40.8%였으나 지난해는 3%에 불과했다. 수출과 고용의 연관성이 그만큼 헐거워졌다는 뜻이다.

 #2. 개통한 지 두 달 된 신분당선(서울 강남~분당 정자역)의 전동차에서 제일 인기 있는 칸은 첫째 칸이다. 운전석이 없어 앞이 툭 트였기 때문이다. 여기선 앞유리를 통해 전동차가 다니는 지하 터널을 훤히 볼 수 있다. 무인 운전 시스템은 싱가포르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도입됐다.

또 신분당선 전동차의 각 칸에는 360도 회전하는 폐쇄회로TV(CCTV)가 두 대씩 설치돼 있다. 운전사도 없고, 질서유지 직원도 줄었다. 신분당선 17.3㎞를 운영하는 인력은 303명이다. ㎞당 17.5명꼴이다. 1~4호선은 이 비율이 66.3명에 달한다. 신기술로 효율을 높인 대신 일자리는 4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기술의 역설 무인운전 신분당선 전철, 직원수 4분의 1로 지난해 10월 개통한 신분당선(서울 강남역~분당 정자역)은 무인운전 시스템으로 운행된다. 첨단 기술 덕에 승객들이 탁 트인 조망을 즐기게 됐지만 일자리는 줄었다. [강정현 기자]

 한강의 기적을 이뤘던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다. 첨단 기술은 생산성을 높였지만 일자리를 줄였다. 한국 경제의 선발투수 역할을 했던 수출의 온기도 대기업 밖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출 대기업의 호조는 국내에서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1981년 중소기업 임금은 대기업의 78%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 청년 실업자들에게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취업하라는 권유가 먹히지 않는 이유다. 높은 무역의존도(87.4%)는 대외 여건의 변화에 국내 경제가 휘둘리는 취약성을 드러내는 증표가 됐다.

수출을 중시하는 일본도 무역의존도는 25.1%에 불과하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과거의 성장모델로 이뤘던 ‘한강의 기적’은 되풀이되지 않는다”며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로 성장의 물꼬를 텄듯이 국민이 끼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선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민간자본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시대에 박정희 모델은 효과적인 산업화 정책이었다”며 “이제는 일자리를 중심으로 성장모델의 변화가 필요하다” 고 말했다.

 일자리를 만드는 새로운 성장모델의 핵심은 내수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2003~2008년 일자리를 가장 많이 늘린 기업 10곳 중 수출 제조업은 세 곳뿐이었다. 일자리 증가 1위 업체는 대표적 내수 서비스업체인 CJ푸드빌이었다. 5년간 종업원 수가 17.5배 늘었다. NHN·교원 등 내수 관련 업체도 종업원 수가 크게 늘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전반적인 서비스업의 경쟁력이 낮기 때문이다. 교육 서비스의 경우 한국은 사업체당 종사자 수가 3.6명인데 미국은 35명이다. 한국 업체는 규모가 작고 영세하다는 의미다. 의사·간호사 등 양질의 일자리는 물론이고 간병인 등 부대 서비스업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의료 부문도 마찬가지다.

해외 환자 유치를 하고는 있지만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다. 삼성생명은 지난해 삼성서울병원 옆에 20층 규모의 호텔을 지으려 했다. 외국의 의료 관광객을 유치하고, 지방 환자의 가족이 병원 가까이에서 묵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계획은 좌절됐다. 서울시가 지난해 11월 고도제한과 주민반대 등을 이유로 건립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을 염두에 두고 조성된 인천 송도신도시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인천시의회에 따르면 2009년 5억5780만 달러였던 송도의 외자유치는 2010년 5억1310만 달러, 2011년 현재 2억6690만 달러(11월 기준)로 줄었다.

 송영길 인천시장은 “인천은 국내 광역도시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도시와 경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유무역협정(FTA)을 하는 이유는 시장 규모를 키우기 위한 것”이라며 “내수시장 규모가 작으면 투자유치를 많이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고려대 강성진(경제학) 교수는 “교육과 의료 부문에서 규제완화가 절실한데 어떤 정치인도 이를 분명하게 약속하지 않고 있다”며 “한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만큼도 개방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특별 취재팀=채승기·김경희·이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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