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 기획] 골드플래너도 월 평균 수입 23만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8면

서울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 한 불법 다단계 업체 교육장을 빠져나가는 대학생들. 경찰과 공정위의 단속이 계속 이어지자 일부 업체는 학생들에게 “양복 정장을 입고 무리 지어 이동하면 튀어 보인다”며 “캐주얼 복장을 하라”는 지침까지 내려보냈다. [강정현 기자]

불법 다단계 업체들은 ‘대박의 꿈’으로 대학생들을 유혹한다. 그러나 그건 허상이었다. 취재팀이 단독 입수한 A업체의 수당 명세서 분석 결과 전체 회원 중 2.9%에 불과한 상위 직급자 골드플래너(GP)의 월 평균 수입이 고작 23만원이었다. 그 아래 직급인 대다수 회원은 월 수입이 없거나 몇 만원 수준이다. 대출 빚으로 내는 합숙소 방값과 생활비도 못 버는것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학생들은 여전히 불법 다단계의 늪에서 대박을 좇고 있다.

 13일 오전 11시, 서울 송파경찰서 다단계 특별수사팀과 공정거래위원회 직원 등 7명으로 구성된 단속반이 송파구 가락동의 한 빌딩에 들이닥쳤다. 이날 단속은 송파 관내 불법 다단계 업체들 본사와 교육센터를 대상으로 동시다발로 이뤄졌다. 1차 타깃은 9월 말 대표를 포함한 회사 관계자 4명이 구속 기소된 A업체 교육센터. 단속반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4층 사무실에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단속반을 막아선 한 상위 직급자가 “왜 정당한 영업행위를 방해하느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단속해도 불법영업은 계속돼=사무실 한쪽 테이블에선 지방에서 올라온 남녀 대학생 2명이 물품구매계약서 작성을 막 끝낸 듯했다. 화장품·건강음료 등 10여 가지 품목을 350만여원에 구입한 계약서도 눈에 띄었다. 상경한 지 일주일 남짓 됐다는 이들은 마천동 한 다세대주택 합숙소에서 지낸다고 했다. 건물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198㎡(약 60평)의 공간에 300여 명의 대학생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들은 단속이 진행되는데도 크게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A업체 제2교육센터가 있는 마천동 한 빌딩도 상황은 비슷했다. 20대 남녀 200여 명이 4층 바닥에 매트를 깔고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곳 최고책임자인 손모(33)씨는 “여기는 교육장이기 때문에 물품 구매서류 등 단속반에 보여 줄 게 없다”고 버텼다. 이곳에서도 새로운 회원 모집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 3층 안내데스크 앞에 이불가방 등 짐을 잔뜩 든 한 청년이 서 있었다. 마산에서 친구의 권유를 받고 올라온 대학생 손모(24)씨다. 단속반원이 “불법행위로 수사받은 업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하자 손씨의 얼굴이 벌게졌다. 손씨는 “방송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친구 말만 믿고 왔는데 다단계 업체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본지 9월 20일자 1면.

 ◆강동·성남·하남으로 합숙소 옮겨=13일 오전 5시30분. 서울 강동구 암사시장 뒤편 다세대주택가에서 4~5명씩 무리 지은 20대 젊은이 수십 명이 골목길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암사역 부근의 한 빌딩. 다단계 업체 B사 교육센터가 있는 곳이다. 여기저기서 “아자 아자! 할 수 있다. 파이팅!” 하는 소리가 들렸다. 3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연단에 올라 “(밖에서는) 아무도 안 믿지만 너희는 충분히 20대 CEO가 될 수 있다”고 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네! 맞습니다. 믿습니다”며 연방 박수를 쳐댔다.

 같은 시각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 입구역 플랫폼. 200여 명의 20대 젊은이가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버스로 성남시 은행동 합숙소에서 이곳 지하철 역까지 이동하는 학생들이다. 경상도·전라도 등 지방 사투리로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가락시장역과 몽촌토성역에서 내린 학생들을 따라가 보니 이들이 도착한 곳은 바로 A업체 교육센터가 있는 건물이다. 최근까지 불법 다단계 일을 했다는 대학생 민모(23)씨는 “거마 합숙소는 줄었겠지만 주변으로 퍼져 나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학생들=불법 다단계의 늪에 빠졌다가 집으로 돌아간 학생들도 후유증이 심각하다. 고리의 사채를 갚지 못해 힘겨워하는가 하면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산 D대학 전기공학과 휴학생 김모(19)군. 올 7월 ‘거마 대학생’이 됐던 그는 경찰 단속이 시작되면서 2주일 만에 다단계 업체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절친한 고교 친구가 거짓말로 꾀어 자신을 다단계 업체에 데려갔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 대인기피증과 충동조절장애 증상으로 정신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김군은 “방위산업체에서 군복무 대신 근무하면서 돈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말을 믿고 서울까지 올라갔지만 모두 거짓이었다”고 말했다.

 다단계 업체에서 올 9월 가까스로 빠져나온 서울 K대학 학생 민모(24)씨는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느라 복학도 미루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내몰린 경우다. 민씨는 이자율 상한선인 연 39%로 저축은행에서 1000만원을 빌렸다. 현재 태릉 인근 유통업체에서 짐꾼 아르바이트를 하며 원금과 이자를 근근이 갚아 가고 있다. 그는 “내가 벌인 일이니까 스스로 갚아야겠지만 언제 끝날지 암담하다”고 말했다.

탐사팀=최준호·고성표·박민제·류정화·홍상지·최종혁·손국희 기자, 이정화 정보검색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