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읽기

아련해진 성장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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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종수
논설위원
경제연구소 부소장

요즘은 아무도 경제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성장이 중요하다는 말을 꺼냈다간 흡사 시대착오적 성장만능주의자나 정신 못 차린 신자유주의자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어쩌자고 개발연대식 성장론을 버리지 못하느냐는 핀잔을 받기 일쑤다. 이명박 대통령의 7% 성장 공약을 떠올린 이들에게 성장의 필요성을 얘기하면 다짜고짜 이제 MB식 토건·개발 시대는 끝났다고 몰아붙인다. 그래서 이젠 아무도 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성장이냐 분배냐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성장과 분배를 이분법적으로 갈라 대립시킨 논법이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그때는 경제성장이 여전히 논의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제를 살리겠다며 출범한 MB정부는 747(연간 7% 성장, 1인당 소득 4만 달러, 7대 강국 도약) 공약을 앞세워 의욕적으로 성장 중시 정책을 펼치려 했다. 그러나 출범과 함께 터진 쇠고기 촛불시위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에 밀려 MB식 성장정책은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졌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후론 MB 정부에서 성장론자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사실 MB정부는 7% 성장 목표를 포기한 지 오래다. 출범 이듬해인 2008년 성장률이 2.3%로 급감한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와 세계적 경기침체 속에 2009년 성장률은 0.3%로 곤두박질쳤다. 그에 따른 기저(基底)효과로 지난해 성장률이 6.2%로 반짝 높아졌으나 결국 성장률은 다시 4%를 밑도는 저성장 기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성장률이 떨어진 근본 원인은 금융위기라는 대외 변수의 탓이 크지만 MB 정부 스스로도 성장 둔화를 되돌리려는 의욕을 상실한 측면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MB 성장정책의 핵심이었던 감세(減稅) 계획은 야당의 ‘부자 감세론’에 밀려 접은 지 오래고, 이제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세를 이룬 ‘복지확대론’에 묻혀 성장정책은 발 붙일 곳을 잃었다. 여기다 MB는 프로젝트형 개발사업만 챙겼지 경제의 중장기적 활력을 높이는 거시정책엔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판에 성장 잠재력을 높이자는 목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당초 전망치 4.5%를 크게 밑도는 3.8%에 그칠 것으로 추정하고, 내년에는 그보다 더 떨어진 3.7%로 전망했다. 정부도 한은의 전망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년에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데 순순히 동의했다. 성장률 목표를 높여 잡지 않고 한은의 전망치를 용인한 것은 내년에 인위적 부양책을 쓰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는 추세적 저성장 기조를 거스를 생각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를 두고 “정책 의지를 과감히 표현해 의욕을 부추기기보다는 시장의 신뢰가 우선이고, 솔직하게 소통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팽배한 복지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배수진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굳이 성장률 높이기에 집착해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이기도 하다.

 그나마 정부의 경제운용계획에 단골 메뉴로 올랐던 ‘성장동력 확충’이란 말은 이제 뒷전으로 밀렸고, 온통 ‘복지 확대’ 소리만 요란하다. 정치권에선 여야를 불문하고 ‘성장’이란 말이 입에 올려선 안 되는 ‘금기어’라도 된 양 아예 자취를 감췄고, 오로지 ‘복지 확대’ 찬양만 울려 퍼진다. 그러나 무슨 수사(修辭)로 덧칠하건 성장이 뒷받침되지 않은 복지는 결코 지속될 수 없다. 복지를 늘릴 재원을 나라 곳간에서 빼먹는 데는 한계가 있다. 곳간을 채우고 불려나가지 않은 채 빼먹기만 하면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 곳간을 채우고 불리는 일이 바로 경제성장이다. 지속가능한 복지는 생산과 소득이 지속적으로 늘어나야 유지될 수 있다. 생산과 소득을 늘리는 일이 바로 성장이다. 그러기에 복지를 말하려면 반드시 성장을 말해야 한다. 성장을 언급하지 않는 복지 확대론은 거짓이다.

 성장 반대론자들은 ‘고용 없는 성장’을 문제 삼는다. 성장을 해봐야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고, 일자리가 늘지 않으면 일반 국민의 소득도 늘지 않으며 양극화만 심해진다고. 맞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성장하지 말자는 주장은 논리의 비약이다. ‘고용 없는 성장’은 분명히 문제지만 성장이 없으면 고용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라면 성장의 내용을 일자리를 늘리는 방향으로 바꿀 일이지 성장 자체를 포기할 일은 아니다. 성장 없이 복지만 늘린다고 일자리가 생기진 않는다. 성장을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복지도 유지된다.

 그렇다면 문제는 보다 분명해진다. 성장을 하느냐 마느냐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선택해야 할 것은 어떤 성장을 할 것이냐다. 그동안 수출 대기업 중심의 성장전략이 고용을 늘리지 못하면서 양극화를 심화시켜 왔다면 이제는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분야로 성장의 중심 축을 옮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수(內需)·서비스업이다. 의료·법률·관광·교육·사회서비스 분야는 고용유발 효과가 큰 대표적 내수·서비스 산업이다. 이들 분야에서 활발하게 성장이 이루어진다면 고용 창출과 양극화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정치권과 정부는 이 명확한 해답을 제쳐놓고 엉뚱한 산길을 헤매 왔다. 이익집단의 집요한 반발 때문이다. 성장의 핵심인 내수·서비스업이 규제로 발목을 잡히다 보니 성장이 지체되고, 성장을 해도 일자리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저성장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복지 확대의 여력도 소진될 수밖에 없다.

김종수 논설위원·경제연구소 부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