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일곱 살 준희의 쪽지가 주는 큰 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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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어제 중앙일보 1면의 “12층 이사 왔어요”라는 사진은 강추위에 움츠린 우리를 모처럼 훈훈하게 만든다.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안에 비뚤비뚤한 글씨와 크레용으로 그린 쪽지가 붙었다. 새로 이사온 일곱 살 준희는 온 정성을 다해 이웃 어른들께 자기 가족을 소개했다. 철자법은 틀렸지만 ‘새해복만이 바드세요’라는 인사말까지 담았다. 준희의 마음은 이웃을 움직였다. 406호 아줌마와 605호 아저씨도 손으로 답장 메모를 써 빼곡히 붙이기 시작했다. “준희야 이사와 반가워”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통로에 큰 선물을 주셨구나….”

 이런 따뜻한 풍경을 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물가 불안에다 빈부격차, 정치 대립 등으로 언제나 뿔난 얼굴인 어른들보다 일곱 살 준희가 백번 낫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가 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읊었는지, 우리는 준희의 쪽지를 보고서야 깨닫게 됐다. 돌아보면 고도성장으로 우리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우리의 삶은 삭막해져 갔다. 좁은 단칸방에서 현대식 아파트로 옮기면서 이웃 사촌이란 낱말도 옛말이 됐다. 준희의 쪽지는 그래서 더 정겹고 각별한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도 삭막한 아파트를 벗어나려는 흐름이 고개를 들고 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아파트와 엇비슷한 물량의 단독·연립주택이 새로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전국 주택의 절반이 아파트다. 좁은 국토와 빽빽한 대도시를 감안하면 우리는 결코 아파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제 서로를 배려하는 훈훈한 아파트, 따뜻한 이웃사촌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일곱 살 준희의 쪽지에서 그 가능성을 본다.

 어디 이뿐이랴. 올해 한국구세군의 자선냄비에는 1928년 모금을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45억3400만원이 모였다. 60대 노신사가 1억1000만원을 내놓았고, 어느 노부부는 각각 1억원씩 모두 2억원을 선뜻 기부했다. 일반 시민들도 형편 닿는 대로 십시일반(十匙一飯)의 행렬에 동참했다. 아직 우리 사회에 나눔과 공생(共生)의 정신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서로 돕고 어우러져 살아온 우리의 DNA가 죽지 않은 것이다. 최근 얼굴 없는 천사들의 기부가 부쩍 늘어난 것도 반가운 현상이다.

 살 만한 세상은 누가 거저 가져다 주는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첫 단추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전통을 되살리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일곱 살 준희가 가르쳐준 대로 오늘부터 아파트 이웃 주민과 반갑게 인사하면 어떨까. 엘리베이터 안에 근엄한 ‘오늘의 말씀’ 대신 알록달록한 메모지로 안부를 전하는 운동을 시작하면 어떨까. 준희의 쪽지는 아주 사소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뭉클한 감동을 잘 살려간다면 ‘더불어 사는 삶’이란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엄청난 사건이 될 수 있다. 준희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