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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우리를 잠식하고 해방시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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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공포'와 친숙한 계절이다. '납량특선(納凉特選)'이라는 멋진 타이틀을 단 기사나 프로그램이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는 공포는 더위를 식힌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공포에 온 몸이 전율하는 느낌을 추위에 떠는 느낌과 동일하게 여기는 메타포다. 사실 공포는 계절적으로 음산한 공포는 겨울밤이 더 어울린다. 공포는 어둠과 안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겨울밤 누군가가 코트의 깃을 올리고 나를 쫓아오는 것이 제대로된 공포다. 아무래도 여름밤에 반바지차림으로 누군가를 놀라게 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름은 공포의 계절이고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공포가 득세할 모양이다.

세계적으로 공포는 주류가 아니다. 흐르는 피와 흩어진 내장, 갑자기 나타나 피를 빠는 흡혈귀와 무덤에서 부활하는 좀비. 좀처럼 친근해질 수 없는 이들이 주인공인 공포 장르는 그래서 중심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주변에 존재해야만했다. 공포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낸 매체는 영화다. 컴컴한 영화관에서 스크린과 혼자 마주해야 하는 수용자가 접하는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공포를 효과적으로 증폭시켰다. 초기 할리우드의 호러, 고전적인 고딕 호러는 공포를 성적인 공격방식으로 해석했다. 당연히 가해자는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이 되었다.

가냘픈 목덜미에 송곳니를 찌르는 드라큐라의 이미지는 살인마의 공포를 넘어서 성적 엑스터시를 가상한다. 음산한 새벽, 비가 내리는 거리의 가스등, 절벽에 홀로 선 고성 등 호러의 이미지는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호러 장르가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의 고딕 소설에 기원을 두고 있다. 가냘픈 여인의 목에서 피를 빨아대는 흡혈귀 장르는 섹슈얼리티와 브루조아의 순응성에 관한 메타포였다. (Susan Hayward, 〈Key Concepts in Cinema Studies〉(이영기 역, 〈영화사전〉, 한나래, 1997)

수잔 헤이워드에 따르면 영화에서 공포의 영역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된다. ① 비자연적인 것 - 흡혈귀, 유령, 악마, 신체강탈 등 (오컬트 장르) ② 심리적 공포(히치콕의 〈사이코〉와 같은) ③ 대학살 영화(Slasher movie)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어느 하나의 특성 보다는 여러 가지 특성이 뒤섞여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포 만화나 영화 혹은 소설을 보다 보면 우리의 일상은 사라지게 된다. 자아가 공포와 두려움은 작품이 제시한 허구의 세계로 성공적으로 들어갔을 때 제공받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공포의 짜릿한 쾌감을 맛보고 싶다면 작품을 보는 순간은 그 세계에 충실해야한다. 그 순간 우리는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공포는 비일상성, 비자연적, 초현실적인 일탈의 경험을 충족시킨다.

만화에서 공포는 영화에서 공포보다 훨씬 복잡한 맥락을 지닌다.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긴장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만으로도, 혹은 괴물에게 쫓기는 주인공들과 관객을 동일시키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인 공포를 관객들에게 경험시킬 수 있다. 그러나 만화는 본질적으로 밝은 불빛 아래서 읽힌다. 만화의 이미지는 칸으로 구분되어있어 독자가 무서울 경우 책을 덮는 것만으로 끝이다. 영화처럼 강제로 공포를 지속시킬 수 없다.

그래서 만화의 공포는 거대한 공포(terror)보다는 스릴러(thriller)에 가깝다. 잘 짜여진 서사의 맥락 속에서 심리적 공포를 준다. 만화에서 용어 그대로 두려움을 주는 공포는 주로 심리적 공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비자연적인 현상이라도 그 비자연적인 현상이 주는 심리적 공포를 조성할 때만 무서운 만화가 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공포 만화 작가인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들은 모두 비자연적인 현상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종내에는 이토 준지 만화의 세계에 들어온 독자들에게 심리적인 공포를 준다. 서서히 독자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독자는 이토 준지가 그리는 공포에 잠식당할 때 제대로 된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여전히 칸 바깥에서 이토 준지 만화를 보면 그저 우스울 따름이다.

일본 만화에서 곧잘 등장하는 괴물이나 요괴 등은 공포보다는 하나의 판타지다. 오히려 만화에서 제대로 된 공포를 체험하기에 적당한 것은 한국식 괴담이다. 한국형 오컬트이자 빼어난 스릴러인 강경옥의 〈두 사람이다〉 역시 오컬트라는 독특한 공포 장르이면서 스릴러다. 그리고 너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라는 한국식 괴담 구조를 채택한 작품이다.
우의정 댁에서 어느 스님의 경고에 따라 뒷산의 뱀(이무기)을 잡아 고아 먹는다. 뱀은 왜 하필 내일 승천할 나를 잡았는가에 분개하며 자신을 잡아먹은 집안에 저주를 내린다. "자자 손손 너희 자손 주위의 2명씩을 조심해라." 1999년 서울, 여고생 한지나의 집에 미국에서 사촌 명현과 친구 이유진이 온다. 친척 모임이 있던 날, 용한 무당이 방문해 사주를 본 뒤 한상태(지나의 아버지) 자손에게서 피해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섞이고 수백년된 원한이 존재하는 〈두 사람이다〉는 매력적인 공포를 제공한다.

나를 잠식하는 공포는 죽음에 이르는 유혹이다. 우리가 공포 만화를 통해 경험하는 쾌락은 금기를 실현시키는 쾌락이다. 서구에서 공포 영화를 즐기는 계층은 청소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많은 영화가 청소년들이 피해자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 판타지와 퇴마물을 즐기는 계층 역시 청소년층이다. 그들이 현실의 스트레스를 공포에 잠식당하고 판타지의 세계를 꿈꾸며 극복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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