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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추억의 그라운드 5. 김시진

중앙일보

입력

한국 야구계에 학번 논쟁이 불고 있다. 최동원-김시진-김용남의 트로이카 시대였던 77학번과 박찬호-조성민-임선동으로 구성된 제2트로이카 시대(92학번)중 어느 학번이 더 우수했었던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77학번의 또 하나의 축인 투수 김시진을 파고들며 그 화려한 뒤안길을 돌아보고 임선동을 재기 시킨 그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1. “야구를 하겠심더”

김시진은 1958년 3월 20일 경상북도 포항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다.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선비같이 곱고 여린 심성이었다. 포항중앙초등학교 시절 그는 공부를 곧잘 쫓아 했다.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해 어렴풋이 작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포항중학교에 진학하고부터 슬슬 공부에 정이 떨어졌다. 그냥 싫었다. 야구부가 있었던 당시 반대항 야구 시합이 있었는데 중2때 시진은 반대표로 나가 야구부 이갑도 감독의 눈에 든다. 당연히 야구부 입단 제의를 받은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지원으로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야구를 하고 싶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단순히 “야구를 하겠심더”라고 대답했던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이다.

2. 대구상고 시절

오늘의 그를 있게한건 대구상고 야구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시내 유명한 중학교를 물리치고 경북도지사기쟁탈전을 우승으로 이끈 시진을 대구상고 강태정 감독이 스카우트했던 것. 강감독은 시진을 촌놈이라고 불렀다. 포항출신이 대구에 왔다고 해서 이 때부터 그의 별명은 촌놈이었다.

중3 가을부터 열심히 훈련을 하던 시진은 1974년 3월 입학식이 있기 직전 강태정 감독이 건국대 감독으로 부임하며 대구를 떠나자 눈물을 쏟고 만다. 2달후 백대삼 감독이 부임하며 좋은 체격조건(173Cm-63Kg)의 시진을 역시 눈여겨본다. 그리고 그에게 기회를 부여한다.

당시 김시진의 동기중에 송진호가 있었다. 송은 초고교급 투수로 평가 받으며 한국의 에가와라는 호칭을 듣고 있었다.(에가와는 갑자원을 재패한 당시 일본 최고의 고교투수) 대통령배 지역 예선전에서 팀이 6-0으로 리드하자 마침내 김시진에게 시험등판의 기회가 주어졌고, 이경기를 잘 마무리하며 서울 본선 명단에 포함되는 쾌거를 맞본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지방고교의 서울 원정길에 인원을 추려서 상경하던 시절. 따라서 1학년이 명단에 포함되는건 행운이자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서울데뷔 무대는 동대문상고와의 경기. 김시진은 안타 2개만 허용하며 2-0완봉승을 이끌어내는 완벽투를 선보인다. 메스컴은 그를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팀은 군산상고에 지며 준우승에 그친다. 이렇게 1학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며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4개월동안 공을 놓는다. 간염과 장티푸스를 거푸 앓았던 것.

쉬고난 후 더더욱 야구에 박차를 가한 그에게 새로 부임한 정동진 감독은 잊을 수 없는 은사였다. 실력도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마침내 고2말에 최초의 고등학생 국가대표가 되었다. 최동원 김용남 노상수와 함께였다. 이 땐 이미 팀내 라이벌인 송진호보다 빠른 공을 뿌리며 고교 최고의 투수 반열에 진입해 있었다.

3. 대학진학과 의리

고3이 되어 첫 대회인 대통령배에서 준우승을 했다. 군상상고에 우승기를 빼앗겼다. 하지만 10월 봉황기에서 기어코 군산상고에 4안타 완투승으로 설욕했고 우승을 차지하며 대미를 장식했다. 대구상고 전성시대를 구가하며 졸업하게 된 것이다. 3년간 전국대회10번 출전에 2번 우승. 고교통산 타율은 3할7푼8리 였다.

그의 고교동기는 10명. 그중 2명은 대학진학이 결정되었지만 그를 포함한 8명은 김시진에 운명을 걸고있었다. 대어인 그가 가는 대학에 나머지 선수들이 함께가는 방법이 유일했다. 김시진은 의리를 위해 명문대학도 포기했다.

강태정 감독의 건국대는 단연1순위 였다. 하지만 건대는 현금 5백만원과 추가 5명의 조건이었다. 연대와 고대는 각각5명과 4명을 더 받는 조건이었다. 이 때 한양대가 8명 모두를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었다. 동료와 함께하는 대학진학은 정말 김시진을 들뜨게 했다.

4. 한양대 시절과 라이벌 김용남

대학에 입학해선 고교 선배이기도한 장효조와 라이벌인 동기 김용남을 만난다. 그리고 김용남과 서먹한 사이는 금새 단짝으로 변한다. 둘은 신체조건이 너무나 흡사했다. 키만 김시진이 1센티 큰 182였고 몸무게(78킬로)와 신발사이즈(270)이 같아서 옷도 신발도 공용으로 사용했다.

1학년생 김시진은 7월에 열린 한미대학야구 대표에 선발돼 미국에 다녀오면서 김용남과 더더욱 가까운 사이가 된다. 하지만 12월 니카라과 대륙간컵 대표에 김용남이 탈락하며 둘은 미묘해진다. 당시 대륙간컵 우승은 한국야구사 70년 만에 국제대회 감격의 첫 우승이었다.

2학년때도 국위선양에 동참하는 김시진은 네덜란드 할렘대회2위와, 8월 이탈리아 세계선수권 3위(당시 목표달성)를 차지하는데 공헌하며 국제감각을 익힌다. 팀은 10월 대학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대학 최강의 위용을 뽐낸다. 이때 멤버는 김시진을 비롯 김용남 이상윤 이만수 오대석 등이고 감독은 작고한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씨 였다.

김동엽 감독은 김용남을 집중 지도했고, 김시진에겐 후배들의 통솔을 맡겼다. 둘은 돈독한 우정을 계속 이었고 좋은 친구이자 라이벌로 야구 생활을 이었다.

5. 타도 ‘포항제철’

졸업반인 김시진에게 실업야구 각 팀은 러브콜을 보냈다. 그 중 포철은 연고를 내세워 5천만원이란 거금을 제시했다. 헌데 김은 당시 한미대학야구에서 어깨부상을 당한다. 언론의 보도는 김시진의 야구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다.

포철의 입장에선 적은 돈으로 김시진을 영입하는 쪽으로 작전을 바꾸었고, 이에 화가난 김시진은 홧김에 경리단(육군)에 입단해버린다. 심말용 감독이 이끄는 경리단은 최강의 전력으로 변했고, 실업 대회를 싹쓸이 했다. 김시진은 포철과의 경기 땐 자원등판해 전승을 거두었다. 시원하게 분풀이를 한 셈이다.

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는 한대화의 극적인 일본전 역전홈런으로 우승을 차지했지만 김시진은 이탈리아전에서 1패만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해 10월 실업야구 5관왕으로 국내최고임을 입증하고(우수선수, 최다승[8] 최다구원[5] 방어율[1.85]) 프로에 입단한다.

6. 프로 최초 1백승 투수

83년 삼성과 계약금 4천만원에 합의하고 대구로 돌아온 그는 어린이날인 5월5일 롯데전을 승리로 장식하며 프로에 발을 내디딘다.

83년 17승을 필두로 84년 19승, 85년 25승, 86년 16승에 이어 87년 23승을 올리며 국내최초로 1백승 고지를 밟는 영예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사이 실연과 아픔도 있었다.

84년 한국시리즈로 가보자. 3차전 8회말 1-1동점 2사 상황에서 홍문종의 타구에 복숭아뼈를 강타당해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5차전에 마취제를 맞고 등판했을 만큼 투지를 불살랐으나 혼자 3패를 하며 결국 최동원의 롯데에 우승을 넘겨주고 울고 말았다.

하지만 85년 좌일융(김일융) 우시진은 각각 25승씩을 거두며(프로 최고 한 팀 20승 이상 2명) 전후기를 천하통일 하며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을 한다. 팀이 77승 32패 1무를 했으니 그중 65%가 두 선수의 몫이었다. 그 해 여름엔 올스타전 MVP에 뽑히기도 했는데 프로최초의 투수 MVP였다.

86년 김시진은 또다시 비운을 맞는다. 해태와의 한국시리즈에서 2패를 당한 것. 결국 팀은 1승4패로 시리즈 재패의 꿈을 뒤로 미룬다. 헌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아직도 삼성이 이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김일융은 86년까지 삼성에 있다가 87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가 10승의 성적을 올리며(다이요 웨일즈 소속) 건재를 과시, 한국야구의 위상도 함께 높여주었다. 재일교포인 김일융은 삼성시절 김시진을 항상 에이스로 높여주었고 뼈있는 충고를 던져주는 그에겐 좋은 스승이었다.

89시즌부턴 롯데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선수노조’ 사건으로 최동원과 대형트레이드가 이뤄진 것이다. 그의 성적은 이때부터 내리막을 걸었다. 뱃심이 부족해 큰 경기에 약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그가 남긴 성적은 훌륭했고 영광을 동반했다. 92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통산 124승73패 방어율 3.12.

7.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그의 스승인 태평양돌핀스 정동진 감독의 요청으로 93년부터 투수코치로 변신했다. 3년간 함께 있으며 찰떡 궁합을 보였다. 하지만 태평양은 현대로 인수 되었고, 현대유니콘스의 초대 감독인 김재박 감독의 코칭스테프 조각에서 제외되며 계열사의 실업팀인 현대피닉스의 투수코치로 2년간 몸담게 된다.

피닉스는 우수한 선수가 많았다. 특히 국가대표 에이스였던 문동환의 폼을 교정하며 스피드를 높이고 제구력을 완성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이 당시 그의 지도자론도 확립된 시기다. 실력향상도 중요하지만 자기 실력을 마운드에서 모두 토해낼 수 있는 요건을 갖추는 투수를 만들자는 것이다.

98년 현대로 돌아온 그는 김수경이란 작품을 선보였다.그리고 그해 마침내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자신의 한을 풀었다. 김수경은 자신이 기록했던 신인최다 탈삼진 기록을(154개-83년) 갈아치웠다.(168개-98년) 15년 만이다. 하지만 그는 더더욱 기뻣다고 한다. 자신이 길러낸 제자가 스승의 기록을 경신하는 장면은 보는이도 흐믓함을 자아내게 한다.

올해 그의 또다른 작품이 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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