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문학 vs 참여문학 가는 길 달랐지만 평생 서로 바람막이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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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호 31면

1984년 무렵의 김동리(사진 위)와 2001년 무렵의 이문구. [사진 중앙포토]

1988년 8월 말.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제52차 국제 펜대회 개막식이 열린 다음 날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이 단체의 창립을 주도했던 이문구가 돌연 탈퇴서를 내던지고 나가버린 것이다. 입회원서가 1번이었던 것처럼 탈퇴서 또한 1번이었다. 전날 국제 펜대회 개막식에서 있었던 한국문인협회 김동리 이사장의 축사가 발단이었다. 축사 가운데 ‘표현의 자유’ 문제에 대한 김동리의 견해를 자의로 해석한 몇몇 젊은 회원이 김동리를 비판하는 성명서를 만들어 배포한 것이었다. 79년 말 남민전 사건 때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김동리 간에 비슷한 일이 있었고 그때도 이문구는 똑같이 행동했다. 반체제 문학운동을 위해 모험을 무릅쓰고 만든 단체를 헌신짝 내던지듯 하게 한 김동리의 존재는 과연 이문구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40> 김동리와 이문구  사제의 끈끈한 사랑

61년 이문구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을 때 김동리는 학과장이었다. 이문구는 일찍부터 김동리를 한국 최고의 작가로 존경했고, 김동리는 이문구의 작가적 재능과 사람됨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문학적 이념과 성향이 달랐다. 쉽게 말하면 김동리는 문학의 순수성을 고집하는 입장이었고, 이문구는 문학의 현실참여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김동리로서는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의 문학적 색깔을 이어받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을 법하지만 이문구는 자기 스타일을 버리지 못했다. 이문구는 재학 2년 동안 무려 24편의 소설을 썼고 그중 9편을 골라 스승에게 보였으나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운명이 되었다. 결국 6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되지만 그 작품도 ‘스승의 맘에 들듯 한 소재와 문장을 택해’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작가가 되었고 여러 편의 소설도 발표하고 있었으나 아무 연고가 없는 이문구의 서울살이는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날품팔이, 건축공사장 인부, 심지어 공동묘지 이장 공사장 인부 따위의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그럴 무렵 김동리가 구세주처럼 나타나 이문구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김동리가 ‘월간문학’을 창간하면서 이문구를 편집기자로 발탁한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된 스승과 제자의 ‘즐겁지만은 않은 동거’는 10년 동안 지속됐다.

이문구가 스승의 체제 옹호적인 정치적 행보에 처음 제동을 건 것은 69년 10월 초, 대통령 3선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김동리는 문협 사무실에서 개헌안 지지 방송을 위한 TV 녹화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여러 명의 기관원이 진을 치고 앉아 있었다. 이문구는 스승 곁으로 다가가 그 방송이 스승의 명예에 누가 될 것임을 역설하고, 스승의 겨드랑이에 한 팔을 끼워 강제로 밖으로 끌고 나갔다. 때마침 들이닥친 방송국 녹화팀이 그들을 채 알아보지 못해 이문구의 ‘스승 납치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 김동리가 마지못해 이끌려간 것은 그것이 제자의 지극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문구도 스승의 그런 사랑을 느껴가고 있었다. 73년 문협 이사장 선거에서 조연현에게 패한 김동리가 이듬해 월간 ‘한국문학’을 창간했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문인간첩단 사건’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여러 문인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이문구는 고은·백낙청·박태순 등과 함께 반체제 문학운동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때 비밀스러운 모임의 장소로 이용된 곳이 ‘한국문학’ 편집실이었다. 반체제니 저항이니 운동이니 하는 것들을 생리적으로 싫어했던 김동리의 성향을 감안할 때 그가 발행인이던 ‘한국문학’ 편집실에서 그 같은 ‘음모’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김동리는 보고도 못 본 체, 듣고도 못 들은 체했다. 오히려 그것이 이문구를 더 힘들게 했고, 더 진한 스승의 사랑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작가회의’의 성명서가 발표된 뒤 한 신문은 기사와 사설과 칼럼을 통해 연일 김동리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참지 못한 이문구는 스승을 두둔하는 반론을 썼다. 등단 이후 20여 년간 이문구가 보여준 문학적 행보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그 반론을 해당 신문사에 보내려 할 즈음 소식을 전해들은 김동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제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갔다. “자네 아이들이 지금 몇 살인가.” “초등학교 5학년, 4학년입니다.” “그럼 참아라, 애들 봐서 참아라.” 스승의 이 말을 듣고 이문구는 원고를 갈기갈기 찢어 없애버렸다. 그 글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불이익이 따른다 해도 두려울 것은 없었지만 스승의 말대로 어린 자식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동리가 90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이문구는 자식 이상으로 스승을 성심껏 보살폈다. 조금이라도 더 스승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었으나 김동리는 95년 82세로 눈을 감았다. 이승에서 미진했던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채우고 싶었을까, 이문구 역시 62세에 이른 2003년 간암을 앓다가 스승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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