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생활 접고 충남 동곡리 정착 '역이민 일기'

미주중앙

입력

충남 동곡리 전경.

여름에도 멀리 설산이 보이는 알래스카의 작은 마을들을 나는 죽을 때까지 마음에서 지워낼 수 없을 것 같다.

대륙의 심연과도 같은 몬태나와 아이다호도 마찬가지이다. 2006년 중반부터 거의 1년에 걸쳐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또 지난 여름 달포 동안 동서 왕복 횡단을 하면서 나는 새삼 느꼈다. 이들이 그 어느 곳보다 내 마음을 붙잡았던 땅들이라는 점을 그래서 남은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알래스카도 몬태나나 아이다호의 한 자락도 아닌 이스트 밸리에 와 있다. 동쪽 계곡을 의미하는 동곡리 충남 공주의 한 시골 마을이다.

구체적으로는 지난 추석을 기해 이스트 밸리에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약 11년에 걸친 미국 생활을 일단 마감하고 어쩌면 여생을 온전히 함께 할 터일지도 모르는 동곡리로 곧바로 날아 왔다.

격렬한 첫 사랑보다 더 강렬하게 내 맘을 사로잡았던 알래스카나 아이다호의 시골이 아닌 동곡리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 당장의 이유는 내년으로 99세가 되는 할머니와 팔순이 멀지 않은 부모를 모셔야 하는 까닭이다.

동곡리는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알래스카나 몬태나의 시골과는 주변 풍광이나 생활 방식이 전혀 딴판인 마을이다.

하지만 많은 시간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몬태나나 아이다호 같은 데서 살고 싶다는 꿈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자연에 묻혀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내게는 끝없이 현재 진행형이 될 동곡리 생활에 대한 기대는 크다.

사람에게 있어 탄생과 죽음에 인접해 있는 기간들 즉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은 보다 명시적으로 자연의 지배를 받는다. 사실 청년이나 중년도 예외일 수 없지만 이 시기에는 많은 사람이 마치 자연의 중력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살려고 한다.

30대 초반 서울의 빌딩 숲 속에서 자연과 한참 멀어진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일종의 신념은 더욱 강고해졌지만 실천을 하는 데는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역량이 부족한 탓이었다.

동곡리는 농촌인데 약간 산촌의 느낌이 나는 곳이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동곡리로 들어오면서 알아듣기 쉽게 귀농하게 됐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원래 농사를 업으로 삼은 적은 없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귀농은 아니다. 잘 되리라고 전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

즉 '귀연'이 나의 목표이자 바람이다. 내가 태어난 나라의 한 구석이라고는 하지만 아마도 서울에서 보스턴과 로스앤젤레스로 삶의 터전을 옮겼을 때보다 동곡리 생활은 훨씬 더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어디에 살아도 한 인생이다. 더욱이 자식 둘은 이제 스물이 넘었으니 어쨌든 부모로서 기본 의무는 대충 치른 셈이다. 잃을 게 그다지 많지 않은 나이이고 그러다 보니 천성이 소심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배짱 혹은 호기를 부릴 수 있게 됐을 수도 있다.

어릴 적부터 미국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간을 돌아다보면 호기심과 방랑 벽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다. 나를 좀 아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래서 이스트 밸리에 푹 파묻혀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현재로서는 시쳇말로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로 맞받는 외에는 도리가 없다.

최근 수년 사이 한국이나 미국 등은 도시화와 고령화가 최고조에 이르는 느낌이 있다. 후기 산업사회 정보화 사회라는 등의 말로는 그 실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불안하면 엄마의 품을 찾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우리가 자연의 품을 한결 그리게 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자연을 만든 조물주의 눈에는 나의 귀연 실험이 귀여운 장난 정도로 비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약간의 힌트라도 된다면 이보다 보람된 일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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