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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왕의 급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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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세종의 아들 문종은 재위 2년(1452) 5월 14일 서른아홉 살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실록』은 “이때 사왕(嗣王·단종)이 어려서 사람들이 믿을 곳이 없었으니, 신민의 슬퍼함이 세종 상사 때보다 더했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의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는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었고 여덟 대군은 강성하니 인심이 위태로워하고 근심하였다”고 인심이 위태로운 이유를 전해준다.

 문종은 종기(등창)를 앓았는데 사헌부에서 문종 사후 “꿩고기 같은 것은 등창에서 대기(大忌·큰 금기)로 치는 것인데도 날마다 꿩구이를 드렸다”면서 어의 전순의(全循義)의 사형을 주청했다. 그러나 단종을 내쫓고 권력을 잡은 세조(수양대군)는 재위 1년(1455) 12월 어의 전순의를 원종(原從) 1등공신으로 책봉했다.

 세조 때 형성된 공신집단 해체를 시도하던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급서했을 때도 여러 의혹이 일었다. 예종 1년(1469) 11월 26일 『예종실록』은 “임금이 불예(不豫·임금이 편찮음)하다”고 처음 와병을 언급했다. 예종은 불과 이틀 후인 11월 28일 진시(辰時·오전 7~9시)에 만 열아홉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젊은 왕이 급서했는데도 조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문종실록』은 도승지 권감(權?)이 여러 재상과 의논해 당일로 후왕이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전한다. 보통 국왕 사후 닷새 정도 후에 후왕이 즉위하는 법인데, 이때는 당일 즉위해야 한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일 후사로 결정된 인물은 예종의 조카 자산군(者山君·성종)이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만 세 살로 어렸다고 쳐도 자산군은 살아 있는 형 월산군(月山君)까지 제친 것이다. 게다가 『성종실록』은 “위사(衛士)를 보내 자산군을 맞이하려고 했는데, 미처 아뢰기 전에 자산군이 이미 부름을 받고서 대궐 안에 들어왔다”고 사전 각본이 있었다고 전한다. 필자가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문종과 예종 독살설을 제기한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급서는 그가 미리 내정했던 김정은으로 권력승계가 이뤄졌고 김정은은 아직 부친의 후견이 더 필요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독살 같은 경우는 아닐 것이다. 다만 문종 급서 때처럼 ‘사왕이 어려서 인심이 위태롭게 여겼다’는 경우와 비슷하다. 이 권력의 공백를 어떻게 메울 것인가가 김정은의 진정한 정치무대 데뷔 과제일 것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