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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잡아먹는다 … 지금 먹이는 ‘국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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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소로스(81)는 더 이상 ‘헤지펀드의 귀재’가 아니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소로스펀드가 외부 투자자들의 돈을 모두 돌려줬다. 소로스 가문의 자금만을 운용하기로 했다. 홀가분해져서일까.

 그가 돌연 이탈리아 등 유럽 국채를 사들였다. 유로 체제의 붕괴 우려가 팽배한 상황에서 그는 위기 지역 국가의 채권을 사들였다. 꽤 많은 양이다. 20억 달러(약 2조3000억원)어치나 된다. 미국의 파생상품 증권사 MF글로벌이 파산지경에 몰리면서 내놓은 자산을 싼값에 사들인 것이다. MF글로벌 최고경영자(CEO)인 존 코자인은 지난해 이탈리아 국채 등을 대거 사들였다. 하지만 그리스 사태가 전염되면서 그 국채 값이 폭락했다.

 소로스의 선택은 단순한 역발상 투자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투자전문지인 스마트머니는 “80대인 그가 전혀 새로운 곳, 벌처펀드(Vulture Fund)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평가했다.

벌처펀드 매니저는 한결 뛰어난 정보력과 판단력을 갖춰야 한다. 파산했거나 파산할 듯한 기업 등의 속살을 잘 들여다보고 실체를 간파할 줄 알아야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처펀드는 ‘금융 폐기물 처리업자’쯤 된다.

 소로스는 요즘 싼값에 거래되는 이탈리아 등의 국채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는 “유럽 리더들이 그리스를 제외한 유로존 회원국 국채를 전액 보장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줄곧 말해 왔다. “그러지 않으면 유럽 위기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소로스는 벌써 이익을 봤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그는 유럽 국채 매입 한 달 남짓 동안에 1억3000만 달러 정도 평가이익을 냈다. 6% 남짓 되는 수익이다. 지급보장만 된다면 채권 만기까지 보유해도 된다. 채권 만기에 따라 20%에서 최고 60%의 수익도 가능할 것이란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소로스의 변신은 내년 글로벌 투자 트렌드가 될 듯하다. 미 투자전문지인 배런스는 “골드먼삭스·모건스탠리·UBS 등 금융그룹들이 ‘부실 증권(Distressed securities)’ 전담 부서를 강화하고 있다”며 “그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유럽 국채”라고 최근 보도했다. 국채는 벌처펀드의 새로운 사냥감이다. 미 기관투자가 전문지인 인스티튜셔널인베스터스는 “벌처펀드가 진화 끝에 내년엔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인 국가(국채 발행자)를 상대하기 시작한 셈”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벌처펀드는 기업이나 지방정부 정도만을 상대해 왔다. 미 금융그룹 JP모건의 설립자인 존 피어폰트 모건은 1890년대 중복 부설로 망한 철도회사 주식과 채권을 사들여 고수익을 챙겼다. 비즈니스위크가 2001년 9월에 선정한 ‘벌처펀드 명예전당’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벌처펀드의 아버지인 셈이다.

오일쇼크와 인플레 시대인 70년대 벌처들은 부동산에 탐닉했다. 구스타브 레비 전 골드먼삭스 대표는 철도와 전기·가스 회사의 주식이나 채권뿐 아니라 은행들이 압류해 처분한 집과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벌처펀드의 사냥 대상은 80년대 전 업종으로 확대됐다. 경기침체와 고금리 때문에 기업들이 무너졌다. 자산운용사 막스하이네(현 프랭클린템플턴)의 파트너였던 마이클 프라이스(58)는 부실한 데이터저장 업체인 스토리지테크놀로지, 가정용품 업체인 선빔 등의 채권과 주식을 사들여 고수익을 거둬들였다.

 『벌처펀드 투자가들』의 지은이인 힐러리 로젠버그는 그의 책에서 “90년대 벌처펀드는 글로벌화하기 시작했다”며 “94년 멕시코와 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때 미국·유럽의 벌처펀드가 남미와 아시아로 사냥 지역을 확장했다”고 설명했다. 외환은행을 헐값에 사들여 고수익을 챙긴 론스타가 대표적인 예다.

  벌처펀드는 기본적으로 고위험·고수익을 좇는다. 미국 투자 전문지인 배런스는 “중간 정도 수익을 내기가 더 어려운 펀드”라고 촌평하기도 했다. 아무튼 주식으로 돈 벌기 힘든 시대에 좋은 대체투자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강남규 기자

◆벌처펀드(Vulture Fund)=야생 세계에서 벌처는 썩은 고기를 먹고 사는 대머리 독수리다. 금융 세계에서 벌처펀드는 파산했거나 파산 가능성 있는 기업, 부실 채권 등을 사들여 재미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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