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아직도 홍위병의 나라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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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호 02면

아홉 발의 총격. 지난 1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중국 총영사관에 날아든 탄알이었다. 중국 어선 선장의 한국 해경 살해로 한·중 사회가 한창 들썩거릴 때였다. 중국 네티즌들은 지레 ‘한국계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이 사건의 주역은 65세 된 중국계로 밝혀졌다. 총영사관 보안요원들이 중국 정부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는 피켓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처박은 데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고 한다. 그동안 중국 총영사관 앞에서는 파룬궁(法輪功)과 티베트의 인권·종교 탄압에 대한 항의시위가 계속돼 왔다.

이양수의 세상탐사

만약 한국계 인사가 총격을 가했다면 사태는 어떻게 전개됐을까. 한·중 관계는 수교 이후 가장 복잡한 국면에 처했을 것이다. 여건은 충분했다. 고(故) 이청호 경사가 불법조업하던 중국인 어부에게 살해됐고, 13일 오후엔 주중 한국대사관 유리창이 공기총에서 쏜 쇠구슬에 맞아 깨졌다. 그런데도 중국의 태도는 지난해 발생한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마찬가지로 아전인수였다. 철 없는 네티즌이야 그렇다 쳐도 중국 외교부의 첫 반응부터 그랬다. “한국 측이 중국 어민에게 합법적 권익 보장과 더불어 인도주의적인 대우를 해 주기를 바란다.”(류웨이민(劉爲民) 대변인) 미안한 얘기지만 중국 정부가 언제부터 그렇게 인권과 인도주의를 떠받들어 왔는가. 중국이 한국의 입장이어도 그랬을까.

중국 사회는 요즘 G2(미국+중국)시대라는 세간의 평가에 내심 흐뭇할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과 20세기 초 열강의 침략으로 짓밟힌 국가적 자존심이 한껏 고양되고 있는 분위기다. 미국·유럽이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중국이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될 날도 예상보다 빨라질 것 같다. 중국은 군 현대화와 첨단무기, 항공모함을 앞세워 중화제국(中華帝國)의 부흥을 꿈꾼다. 중국 대세론이 횡행하는 가운데 ‘차이나 파워’를 절감하게 된다. 참 좋은 일이다. 가까운 나라 중국이 전 세계로 흥기(興起)한다는 것은 분명 축하할 일이다. 1980년대 일본의 부상처럼 2010년대 중국의 부상은 한국과 동아시아에 새로운 활력과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중국의 20∼30대 네티즌들이 10여 년 전부터 보이는 국수주의 물결이다. 그들은 이번 한국 해경 살해 사건에도 어김없이 오만과 왜곡과 편견을 드러냈다. 중국의 젊은 세대가 신(新)홍위병 시대의 도그마에 갇혀 있지 않은지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애국주의라는 미명 아래 ‘마오쩌둥(毛澤東) 어록’ 대신 국수주의의 기치를 흔들고 있지 않은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혐한(嫌韓)·반한(反韓)의 굴레에 갇혀 엄연한 사실을 뒤틀고 부풀리고 있지 않은가. 이런 현상들은 단순한 민족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한·중 관계를 위협하는 변수로 부상했다.

문화혁명의 광풍을 견뎌낸 중국의 전·현직 지도층은 젊은 세대의 국수주의를 방관하는 눈치다. 국내의 불만·분노를 달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부각시키는 통치기술의 하나일지 모른다. 마오쩌둥 시대에 홍위병들은 중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들의 구호는 이른바 ‘중국식 공산주의’였다. 90년대 후반 베이징에서 필자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던 노교수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자식이 부모를, 아내가 남편을, 제자가 스승을 고발하던 시대였다.”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에서 ‘마오 주석의 사진이 실린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며 홍위병 학생이 교수를 당당하게 폭행하고 고발했다고 한다. 어설픈 이념이 이성과 지성을 짓밟던 야만의 시대였다. 이런 홍위병 시대의 난폭한 감정과 집단 논리가 한·중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지 않은지 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한·중 관계는 양국 모두에 중요하다. 한·중 관계가 삐걱대면 한반도도 괴로웠지만 중국 대륙 역시 격동의 늪에 빠져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할 이유다. 하긴 중국뿐이랴. 한국에서도 한·중 관계의 중요성을 모르는 젊은 세대는 또 얼마나 많은가. 무분별한 국수주의 감정의 배설에 양국 관계가 얼마나 상하는 줄도 모르는 채 말이다. 양국 지도층 모두 고민해야 한다. 한·중 관계를 더 이상 신(新)홍위병들의 손에 내버려 둬선 안 된다. 다듬고 가꾸어야 한다. 그게 동아시아 시대에 공존공영으로 가는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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